도른자
콥찰리치는 동네 소개 담당
루나는 협업 및 놀러 다니기 담당
이보는 형이랑 세트로 붙어 다니며 사진 담당
그리고 인도에서 온 소멘은 - 하필이면 얘 담당이 전형적 인디언 클리셰라서 애석하지만 - 영적인 영감 담당이었다. '영적'이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삶에 영적이지 않은 순간이 어딨겠냐만 이 인간은 그 영역에서 탁월한 진부함을 지니고 있었다.
콥찰리치를 만나기 전, 같은 날 오전에 소멘을 먼저 만났다. 1편과 살짝 겹치지만 당시 상황은 이러했다:
눈부신 햇살에 화가 나서 대리석 돌바닥에 앉아 문방사우를 펼침.
가방에서 물통 꺼내 벼루에 쫄쫄.
먹을 쥔다.
동글동글 먹을 갈기 시작,
'엇! 갑자기 마음이 밝아졌어. 이게 뭐야!?'
- 배경 음악이 massive attack의 teardrop에서 bjork의 all is full of love로 바뀜 -
햇살이 따스하고 사랑스럽다.
고개를 든다.
앞에 광명하게 미소 짓는 인간이 서 있다.
휘황찬란한 미소에 내 귀가 잠시 멀고
그가 뭐라고 지껄인다.
"ㄴㅇㄱ ㄱㄹㅈㄲ ?"
고개를 흔들고 그를 다시 쳐다본다. 내 또래쯤으로 보이는 이 아이.
"뭐?"
"니 얼굴 그려줄까?"
저러고 슥슥 뭔가를 그리더만 윤슬 넘실대는 강과 언덕을 그려놓았다. 내가 강처럼 생겼다는 말인가? 아니면 언덕? 그것도 아님 윤슬?
누가 보면 전형적 픽업아티스트(꼬시는 사람)라며 '아찌야 도망가!' 할 수 있지만, 나는 내 육감 신호에 무슨 불이 들어오는지만 살피면 되었으므로 그림을 고맙게 받았다.
"너 근데 자전거에 뭐라고 써 놓고 다니는 거야?"
"에이즈 인식 개선 운동. 내가 살던 동네에 에이즈 환자가 많았어. 나는 사람들이 에이즈에 대해서 경각심을 갖길 바래. 그리고 이미 걸린 사람들에 대해서는 낙인찍지 말고 그냥 같은 인간으로 봐줬으면 좋겠고. 그래서 가는 곳마다 관련 강의 하고 펀드레이징도 하고, 2004년에 시작했는데 가는 곳마다 현지 대사관 도움을 많이 받고 있어."
"어머. 넌 참 똑똑하게 여행하는구나. 나처럼 길바닥에서 나뒹굴며 여행 자금 마련하는 사람과는 아주 대조적이야."
"근데 저것도 그냥 여행 제목일 뿐, 본질은 나를 알고 싶어서야."
"너는 너 너무 이미 잘 알게 생겼어. 뭘 더 알고 싶은데?"
"그걸 알고 싶어. 내가 뭘 더 알고 싶은지."
"그래서 언제까지 할 거야?"
"나 마흔 살 될 때까지. 2022년."
"지금 2009년인데 2022년까지 한다고? 너 제대로 미쳤구나. “
"내가 보기엔 너도 미쳤어(웃음). 그래서 멀리서 널 보고 그려야겠다 싶어서 가까이 와 봤지. 사람들이 미쳤다 하건 말건 이 길은 내 길이고, 난 행복해."
"행복하면 됐지. 그 길에 서 있음을 축하한다! 근데... 나 인간인데 왜 자연물을 그려놨어?!“
소멘은 아무 말 없이 씽긋이 웃었다.
2022년은 끝내 오고야 말았고,
그는 지금도 여행 중이다.
지구를 여러 바퀴 돌다 보니 가는 곳마다 친구들이 있고, 집이 있으며, 다들 자기 동네 언제 오냐 아우성이다. 그의 친구들은 그와 밥을 해 먹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안정적인 그들의 삶에 위험하게 사는 친구가 있음에 안도한다. 마음으로 연결된 자신의 친구가 그렇게 살았으니 자신들이 그렇게 산 거나 다름없다며.
그도 나도 마흔이 되었던 2022년,
그는 LA에 도착했다.
당시 나는 팔자에 없는 공무직에 몸 담고 있었고, 직장 근처로 나를 보러 온 그를 만나러 라크마로 뛰어가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라크마 입구에 Urban Lights라는 설치미술이 있는데 그 앞에서 둘이 얼싸안고 울다 웃다를 열 번 정도 반복하고는, 서로에게 덕담을 남긴 채 헤어졌다.
“우리 둘 다 아직 미친 것 같아 다행이야.“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