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살 무렵, 하루는 혼자 집에서 가족앨범을 보다가 사진의 여백들을 없애고 싶어서 얼굴과 맘에 드는 여백만 남긴 채 가장자리를 손으로 찢어 버렸다. 그리곤 이 조각들을 거대한 프레임 (가로로 꽤 길었던 프레임으로 기억함)에 나름의 스토리를 담아 배열했다. 비좁은 앨범 속에 갇혀있던 얼굴들이 일제히 참았던 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 뿌듯했다.
넷째 딸의 기행奇行을 마주한 연희는 웃음기 묻은 화난 얼굴로 왜 그랬냐고 물었고, 아빠는 흐뭇한 표정으로 혼자 했냐고 물으셨다. 그렇다고 하자 아빠는 더 흐뭇한 표정을 지으시며 크게 칭찬하셨다. 그때 나는 열 살이었다.
어릴 적 버릇은 어른이 되어서도 이어졌는데, 한 번씩 연희 집에 갈 때면 나는 군데군데 몰래, 혹은 대 놓고 낙서를 해 놓곤 했다. 고추장 된장 간장이 올망졸망 모여있는 장독대를 보자 '연희 장독대'라고 적어야만 할 것 같았다. 연희 장독대에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한가득이었고 주변으로 온갖 과실수와 은행나무도 굉장히 연희스런 방식으로 놓여 있었으므로 그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성페인트로 '연희 장독대'라고 커다랗게 적고 빨간 아크릴로 낙관도 그려 넣었다. 그걸 본 연희는 또 웃음기 묻은 화난 얼굴로 왜 그랬냐고 물었고, 아빠는 크게 칭찬하셨다. 그때 나는 서른 무렵이었다.
연희는 성질이 대단한 여성이었지만 넷째 딸을 키울 때쯤 원만한 사람이 되어 화난 얼굴에 웃음을 묻힐 줄 알았다. 그래서 나는 연희를 떠올릴 때면 웃는 얼굴, 가령 뒷마당에 심어놓은 도라지 뿌리를 캐면서 '옴마야, 세상에-' 감탄하는 얼굴이 디폴트 표정으로 각인되어 있다.
언니들은 젊어 혈기 왕성한 엄마 손에 자랐기에 그녀들의 뇌리에는 아마도 다른 연희가 각인되었을지 모르겠다. 아니, 그렇다고 언니들이 말했다. 어쨌든 나는 빛화한 연희를 모친으로 두는 행운을 누렸기에 내 멋대로 자랐다. 가끔은 좀 더 엄한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면 내가 달라졌을까 생각해 보는데, 별로 그럴 것 같진 않고.
에리히 프롬은 아버지 사랑은 조건적이고 어머니 사랑이 무조건적이라 아이들은 두 가지 사랑을 다 경험하며 자란다고 했는데, 우리 집은 아버지가 웃기고 어머니는 귀여웠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웃기고 귀여운 거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