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eative blocks
어딘가 막힌 느낌이 들 때, 밀가루 풀을 만들어 종이를 바른다. 이 용도로 쓰는 커다란 캔버스가 있다. 저녁 먹고 회신해야 할 이메일 하나를 두고 명료한 판단이 서질 않아, 또 풀질을 시작했다.
종이를 봑봑 찢어 두 손으로 풀을 팍팍 묻혀가며 아무 생각 없이 바르다 보면 캔버스랑 춤추는 느낌도 들면서 다시 뭔가가 흐르기 시작한다.
남편은 이게 풀질을 잘해야 하는 게임인 줄 알고 목공풀로 하지 왜 밀가루로 하냐고 물었다. 이렇듯 남편은 조언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조언하지 말고 응원만 하라고 11년 째 당부하고 있지만 소용없다.
나는 대답대신 은은한 미소로 하던 일을 이어갔다. 미국 사람에게 밀가루풀의 질감이 주는 센세이션을 영어로 설명하기엔 저녁을 너무 많이 먹어 헛소리가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 은은한 미소에 경미한 마상을 입은 남편이 말을 이어갔다.
"이거 좀 이제 너무 두꺼운 거 아니야? 사선으로 완전 휘었어, 봐봐. 한쪽 끝이 벽에서 붕 떴어."
남편 말이 맞았다. 풀칠을 당하다 당하다 오목렌즈처럼 휘어버린 것이다. 시각적으로 뭔가 똑 떨어지지 않는 것에 큰 불쾌감을 느끼는 나는, 지금까지 내게 모든 걸 내어 준 이 휘어버린 캔버스를 - 내게 모든 걸 내어주다 휘어버린 이 캔버스를 - 당장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동시에 오랜 친구를 내치는 것 같아 떳떳지 못한 마음이 올라왔다. 부끄러웠다. 그럼에도 시각적으로 똑 떨어지지 않는 것은 나를 너무 힘들게 한다.
아침이 밝았다.
내게 모든 걸 내주다 휘어버린 캔버스를 마주했다. 이 휘어짐을 되돌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정답은 질문 안에 있었다. 그냥 되돌리면 된다. 붙여놨던 종이 떼내면 된다. 오오, 그래. 그럼 되지.
캔버스를 바닥에 놓고 물을 흠뻑 부어 끝도 없는 겹들을 좍좍 뜯어내기 시작했다. 뜯다 보니 이게 풀질보다 더 재밌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여태 풀질을 했던 이유가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점점 홀쭉해지며 수평을 되찾는 캔버스를 보면서 굉장히 다양한 상들이 떠올랐다. 이렇게 또 어제 없던 내가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