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en there done that
"이쪽이야!"
타마라가 누군가를 향해 손을 흔든다. 추수를 앞둔 황금 들녘을 머리에 두른 한 남자가 걷는 리듬에 맞춰 풍성한 곱슬을 공중에 띄우며 다가온다. 환한 미소 속에 치아교정기가 있다. 들녘과 교정기의 간극이 마음에 들어서 좀 오래 보게 천천히 걸어왔으면 하던 찰나, 발은 아직 도착도 안 했는데 말부터 멀리 던져버리는 이 사람.
"크로아티아어 어려울 텐데 괜찮겠어?"
타마라가 대충 상황을 미리 설명해 놓은 모양이었다. 첫인사도 없이 대뜸 본론으로 들어가는 모양새에 왠지 모를 편안함을 느꼈다.
"어, 진짜 어렵더라. 학원 다닌 지 이제 삼일 정도 됐는데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근데 단어 끝에 조사 붙는 게 한국어랑 비슷해서 깜짝 놀랐어."
"한국어도 그래? 신기하네, 슬라브어만 그런 줄 알았는데. 나는 처음에 영어 배울 때 진짜 적응 안 되더라."
"나도. 어미에 조사 붙이면 공간도 덜 차지하고 얼마나 편해! 그걸 하나도 안 써먹다니..."
지구에서 패권을 잡은 한 언어에 대한 질투와 결핍이 적절히 버무려진 작은 나라 사람들의 - 한국은 작은 나라는 아니고 미들파워지만 - 소소한 한풀이가 한참 동안 이어졌다. 타마라처럼 따뜻하고 친절하면서 말투에서 어딘가 강단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젤레미르는 나 만큼이나 걷는 걸 좋아했다. 차차 친분이 쌓여감에 따라 크로아티아어 공부라는 명목은 새까맣게 잊은 채 싸돌아다니기 바빴다. 마침 그의 걸음도 빠른 편이었기에 -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걷는 속도가 달라서 헤어질 결심을 했던 적이 있는데, 그의 걸음은 전형적인 캘리포니아 사람이었다 - 우린 만나서 헤어질 때까지 자그레브를 구석구석 싹싹 빗었다. 그도 나도 어렸지만 올드소울이라 젊음의 한가운데에서 젊음이 뭔지 알았다. 노는 일이 공부보다 시급했다.
물론 다 가질 순 없었다. 열심히 놀아 영혼에 살이 쪘지만 크로아티아어는 전혀 늘지 않았다. 오직 생존에 필수적인 단어, 이를테면 아이스크림가게(slasticarnica, 슬라스티차르니짜) 같은 단어 만이 오롯이 내 것으로 남았다. 슬라스티차르니짜에는 맛있는 케이크도 많았기에 걷다 지친 우리는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올드소울에도 종류가 있는데 나는 냉소적인 올드소울을 피해 다녔다. 그들은 'been there, done that. 다 해봤는데 부질없어.'을 입에 달고 마치 세상을 달관한 듯한 말투를 지닌 특징이 있었다.
문제는 그들도 구멍 난 캔버스화를 좋아했다는 것. 어딜 가나 가짜는 한 끝 차이였기에 나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돌아다녔다. 무엇보다 나도 정신줄 놓는 순간 얼마든지 그 길로 접어든다는 걸, 그러기 쉬운 성정을 지녔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처음 느낀 건 유년기 시절이었다. 그 시기에 찾아온 거대한 공허를 한번 넘어서자 온 세상이 부질 있었다. 그리고 또 한참을 부질없다가, 있다가 없다가 있다가 없다가, 결국 있는 세상에 안착했다. 딱히 이유는 없고 그냥 그 세계가 더 건강해서. 건강치 않을 때 나는 삶이 불편했다. 그래서 오직 내 편의를 위해 부질 있기로 했다.
"너 마그마magma라는 밴드 들어봤어?"
"아니, 미국 밴드야?"
"프랑스 애들인데 자기네들이 만든 언어로 노래를 하거든. 신기해, 한번 들어볼래?"
아침에 오랜만에 젤레미르의 플레이리스트를 틀었다. 트랙에 녹아있던 대화가 자동 재생되었다. 한참을 그렇게 자그레브에서 만난 얼굴들을 손가락으로 스크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