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정 거리
"사진 찍어도 돼요?"
절로 신뢰가 가는 목소리에 말투가 예뻤다.
"흐르보예라고 합니다."
옐라치치 광장에 앉아있다 보면 위험한 사람 평범한 사람 재밌는 사람이 비슷한 비율로 오고 갔기에 타자를 향해 얼마나 나를 여닫을지가 매일의 화두였다. 흐르보예는 평범과 재미 사이의 안전한 인간으로 보였고 나는 자연스런 내 모습을 꺼내기로 했다.
"카메라 너무 큰 거 아니에요?"
“오늘 오랜만에 시내에 출사를 나왔어요. 날씨 너무 좋죠?"
"아, 사진작가시구나."
"작가는 아니고 그냥 재미로 하는 거예요. 직업은 전혀 다른 분야고."
순간, '전혀 다른'이라는 표현에 장난기가 발동했다.
"사진작가와 전혀 다른 분야?... 그런 게 있어요? 그게 뭐죠?“
초면에 이런 말투를 잘 사용하진 않지만 그에겐 내 안의 어린이를 불러내는 힘이 있었다.
"하핳. 외교관으로 중국에 있다 돌아왔어요."
대사를 하기엔 너무 젊고 영사나 참사관 정도의 직무를 하다 돌아온 모양이었다. 시선은 종이를 향한 채 붓을 놀리며 생각했다.
'내 말투가 기분 나쁘지 않고 웃긴가 보군. 다행이야.'
흐르보예는 내 글씨를 여러 개 구매하는 사이 주중크로아티아대사관 재직 시 벌어졌던 이런저런 - 다소 내 귀엔 대외비로 들렸던 - 일화들을 스스럼없이 풀었다. 그도 나를 안전한 인간이라 느낀 것 같았다.
"이거 언제 끝나요? 실례가 안 된다면 저녁 같이 먹을래요?"
"그래요!"
나는 선뜻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펼쳐놨던 문방사우를 둘이 나눠 들고 높은 언덕에 있는 한 식당으로 향했다. 드바(dva)라는 피자 레스토랑이었다.
드바의 피자는 건강한 재료로 맛과 아름다움을 스르륵 아무렇지 않게 펼쳐놓은 작품 같았다. 크로아티아어로 숫자 2를 뜻하는 식당 이름도 마음에 쏙 드는 데다, 자기가 최고는 아니라는 태도가 피자를 더 맛있게 느끼도록 부추기고 있었다. 페퍼론치노가 담긴 올리브유 병을 손에 쥐고 한참을 바라보다 피자 위에 휘휘 두르며 말을 건넸다.
"이 집 이름이 마음에 들어요."
"그쵸? 만약 이 집 이름이 예단이었다면 나는 올 생각도 안 했을 거예요."
예단(jedan)은 크로아티아어로 1을 뜻한다. 듣는 사람 웃건 말건 시치미 뚝 떼고 있는 모습에 아빠가 떠올랐다. 그날 후로 흐르보예와 나는 드바의 피자를 열두 판 정도 함께 먹으며 시시하고 사소한 이야기를 원 없이 나누었다.
같이 있으면 세상만사가 웃겼다. 드바로 가는 길에 파머스마켓이 있었는데, 머리에 바구니를 이고 있는 통통한 아주머니 동상이 있었다. 파머스마켓임을 알리기 위해 저런 진지한 구릿빛으로 아주머니 동상을 세웠다는 게 갑자기 웃겨서 미칠 것 같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 땅바닥을 치면서 데굴데굴 굴렀다. 그런 나를 보더니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가 말했다.
"주말에 플리트비체에 사진 찍으러 갈 건데 같이 갈래요?"
"아... 배 아파 죽을 것 같아... 오 마이갓 저 동상 좀 봐요!"
"저게 왜요? 뭐가 웃기지? 플리트비체 진짜 예뻐요! 같이 가요!"
"앜ㅋㅋㅋ 진짜 나 배 찢어질 듯! 근데 플리트비체는 너무 멀어요."
한참을 웃다 나는 너무 멀다는 핑계로 거절했다.
그와의 인연은 드바에서 피자 위에 페퍼론치노 올리브유를 휘휘 둘러가며 웃긴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가 적당하다 느껴졌다. 보기 드물게 좋은 사람이었기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 여행하다 정말 진국인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나도 모르게 그런 식으로 거리를 두는 버릇이 생겼다. 그래서 그들과 오랜 시간 함께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