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가대 좋아하는 디제이
레오는 뒷모습을 먼저 보았다.
조용히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옐라치치 광장. 한 남성이 자전거를 타고 천천히 내 옆을 지나갔다. 페달을 밟는 모습이 어찌나 여유로운지, 태어난 김에 자전거나 타러 나온 사람 같았다.
'옷이랑 자전거랑 너무 잘 어울려... 색 조합 뭐야, 너무 근사하다.'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별안간 자전거가 크게 반원을 그리더니 내가 있는 곳으로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앞모습은 더 근사했다.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분위기가 보였다. 그의 자전거가 내 앞에 무사히 당도하기를 여유롭게 기다렸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근사하고 예쁘고 멋진 것들을, 그게 겉모습이건 속모습이건 두 팔 벌려 환영한다.
내 앞에 자전거가 멈춰 섰다. 그런데 멀뚱멀뚱 아무런 말이 없다. 흔한 형식적 미소조차 없는 텅 빈 표정으로 나와 글씨를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침묵을 어색해하는 편은 아니지만 예쁜 걸 보면 예쁘다고 말해야 속이 시원한 내가 먼저 말을 건넸다.
"셔츠가 너무 예뻐요. 진한 남색 바탕에 샛노랑 레터링! 어디서 샀어요?"
"빈티지샵에서 샀어요. 끝나고 같이 갈래요?"
솟대처럼 우뚝 서서 천년만년 아무 말 안 할 태세로 서 있더니 갑자기 또박또박 저돌적이다. 이 사람 뭐지? 언젠가 한 프랑스 작가의 소설에서 봤던, 말문 트인 아기가 생각났다. 아멜리 노통이었나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애가 태어나서 다섯 살이 될 때까지 아무 말도 않다가 갑자기 뱉은 말이, 단어가 아닌 정제된 한 문장이었던
빈티지샵을 필두로 레오는 동네 맛집, 할인 마트, 자기가 좋아하는 클럽, 공원, 책방, 성당을 차근차근 보여주었다. 말수가 별로 없고 조용한 편이었지만 입을 열어 말을 할 때면 뭐든 다 따라 하고 싶게 하는 힘이 있었다.
밤에는 디제잉을 하고 낮엔 레코드가게에서 일했는데, 하루는 디제잉을 마치고 조용한 새벽 거리를 함께 걸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갑자기 돕바 안주머니에서 뭔가를 한 뭉탱이 꺼내 들었다. 돕바는 경상도말로 도톰한 재킷이다.
"너 꿀 좋아해?"
"꿀? 별 관심 없는데? 왜?"
"꿀 몸에 좋아. 나는 꿀 좋아해."
청유형도 아니고 '그저 나는 그렇다'는 단순한 말에 저렇게 권위가 실릴 일인가.
나는 꿀 좋아해. 이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길래 이리 가벼운 취향 선언에도 힘이 있는가. 나는 이제 앞으로 꿀을 먹게 되겠구나.
그런 식으로 레오에게 낚여 나는 토마토, 올리브유, 프리즈비(원반 던지기), 더스미스(the smiths, 영국 밴드)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이 인간의 호흡은 세상의 리듬보다 느렸다. 사람과 사물을 대하는 방식과 자전거를 타는 모습에 일관이 흘렀다. 자신의 기류로 주변 공기를 바꿨다. 성급함이 악의 원천이라면 그는 반대편에 서 있었다. 권위가 거기서 나오는 것 같았다.
그때도 어렴풋이는 알았지만 성급함은 자체로 재앙이고 그것의 유지에는 커다란 어리석음이 지속적으로 요구되기에, 레오를 그 시절에 만난 건 행운이었다.
"내가 말했던 그 성가대 공연 오늘 저녁이야. 표가 없어서 못 들어갈 수도 있는데, 일단 플라워 광장에서 만나자!"
표가 없으면 당연히 못 들어가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일단 나갔다. 어둑해진 저녁, 공연장은 이미 관중으로 꽉 차있었다.
레오는 입구에 서 있는 행사 담당자에게 천천히 다가가 무언가 말을 건네었고, 행사 담당자는 이내 손짓으로 우리를 공연장 내부로 안내했다. 착석과 함께 나는 레오에게 작게 소리쳤다.
"방금 저 사람한테 뭐라 한 거야?"
"응, 그냥 있는 그대로 말했지. 이 성가대의 공연을 너무 보고 싶었는데 티켓을 구하지 못했다고. 혹시 비는 좌석 있으면 들어가도 되냐고."
의자가 조금 불편했지만 훌륭한 공연이었다. 분주한 공연장을 빠져나오며 레오가 백팩에서 프리즈비를 꺼냈다. 공연 감상평 따위 접어둔 채, 성당 옆 공터에서 냅다 프리즈비가 시작되었다.
원반이 밤공기를 가르는 소리
너와 나의 손에 착착 감기는 반복적 리듬
내추럴 하이
*레오의 이야기는 <자그레브 사람들> 연재가 시작되기 훨씬 전인 2022년 겨울에 한번 발행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