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침이 Dec 06. 2023

수상한 방문객




오전 10시 48분. 


소소한 가정일을 끝내고 드디어 나만의 휴식을 보낼 시간이 왔다. 설레는 마음으로 음악을 틀고 커피를 내렸다. 소파에 앉아서 막 책을 집어드는데 갑자기 벨 소리가 들린다. 깜짝 놀라서 하마터면 커피를 쏟을 뻔 했다. 평화롭던 고요는 시끄러운 기계음의 반복으로 한 순간에 깨지고 말았다. 띠리리리- 공동 현관에서 방문을 요청합니다. 띠리리리- 공동 현관에서 방문을 요청합니다. 이 시간에 누구일까? 짜증 섞인 마음이 들었다.


이사온 지 이제 겨우 두 달째, 집에 올 사람이라곤 한 명도 없었다. 통화를 누르니 화면 속에는 웬 낯선 중년의 여성이 온화한 얼굴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서있다. 여자는 증명사진을 찍는 것처럼 정면으로 서서 움직이지 않았는데, 얼굴이 카메라와 너무 가까운 탓인지 네모난 화면에 이목구비가 꽉 들어찼다. 약간 부담스러웠지만 그녀가 동그란 안경을 쓰고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어서 그런지  위협적인 느낌은 받지 않았다. 다만 누구세요? 하고 몇 번이나 물어도 말 없이 미소만 짓는 것이 좀 수상쩍게 느껴졌을 뿐이었다.


내가 누구를 불렀던가. 이사를 오면서 근까지 가전설치와 같은 일들로 낯선 이들이 자주 집을 들락날락거렸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약속이 있을 수 있다. 도시가스 검침원? 세대내 소독하러 오신 분인가? 아니면 아파트 실거주 확인하러 다니는 통장님? 그런 말은 사전에 없었는데... 아, 맞다. 혹시 호수를 착각해서 다른 집 누르려던 걸 잘못 눌렀나 보다. 매번 동호수를 정확하게 알려드려도 우리 집에 오실 때마다 집 찾기가 어렵다며 쩔쩔매는 부모님이 떠올랐다.


무슨 아파트들이 다 똑같이 생겼니. 몇 동인지도 못 찾겠고, 두번은 못 오겠다.  


그러니까 저 여자도 우리 부모님과 같은 경우일 거다. 아들이나 딸 집에 찾아왔는데 버튼을 하나 잘못 누른 거지. 어쩌지, 그냥 열어줄까. 그래도 요즘 세상이 워낙 험하지 않은가. 어설픈 짐작만으로 낯선 타인에게 문을 열어주기에는 좀 위험하다. 에잇, 그냥 모른 체 할까.


결국 망설이다가 한참동안 울리는 벨소리를 견디지 못하고 문을 열어 주었던 것은, 남편이 며칠 전에 분실한 카드의 재발급을 요청했다는 사실이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문열림 버튼을 누르기까지의 시간은, 그러나 실제로 따져보면 고작 수십 초에 불과했으리라.)

 



여자는 예상 외로, 재발급한 카드 따위를 주려고 온  아니었다. 현관 문을 열어주자 여자가 환한 표정으로 종이 하나를 건네왔다. 얼결에 받아든 직사각형의 종이에는 외국인들의 그림과 함께 [성경 말씀]이 적혀 있었다.


문 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 전하러 왔어요.


여러 가지를 떠올렸지만 이건 전혀 예상치 못한 방문 목적이었다. 나는 너무 당황하고 말았다. 아... 죄송합니다. 어쩌다 보니 그녀를 밀어내듯 현관문을 닫아버렸다. 그녀도 당황한 듯 다. 잠시 현관문 밖에서 머뭇거리는 듯 싶더니 곧 체념을 했는지 엘리베이터를 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고, 이게 무슨 일인가. 허탈한 마음으로 소파에 앉았다. 그러니까 방금 그녀는 '방문 전도'라는 것을 한 모양이었다. 단정한 옷매무새에 동그란 안경을 쓰고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는 무작위로 벨을 누르고 나처럼 문을 열어주는 낯선 이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중이었다. 문득, 요즘 같은 세상에선 아주 용감한 전도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종교인들에게 많은 전도를 받아왔지만 오늘같은 방문 전도는 처음이었다. 언젠가 마음이 외롭고 적적한 사람들, 이를테면 아기 엄마들이나 노인들 같은 경우에 방문 전도 성공률이 높다는 말을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안타깝게도 현재의 나는 종교가 없으며 그나마 호감을 가지는 종교가 있긴 하지만 오늘 찾아온 여자가 권유한 그 종교는 아니었다. 그 종교 교리 자체에는 관심이 있으나 우리 나라 종교 시설 특유의 분위기가 내성적이고 낯 가리는 내 성격과는 잘 맞지 않았다. 


초등학생일 때, 전도를 받아서 성당과 교회에 동시에 나간 적이 있었다. 토요일에는 같은 아파트에 사시던 담임 선생님의 권유로 성당에 다녔고, 일요일에는 친구의 엄마가 집으로 찾아오셔서 교회에도 나가야 했다.

그러나 그때의 나날은  내게 주말에 푹 쉬지 못한다는 정신적 고통 외에는 그다지 인상적인 경험이 되어주질 못했다. 어린 마음에도 가끔씩 거부감 같은 게 들었는데 그러면 감히 그런 마음을 느낀 내 자신이 죄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찝찝하고 혼란했던 감정들이었다.

요컨대 그 종교와 관련된 경험들 중에서 내 개인의지라는 건 조금도 섞이지 아니하고 하나같이 주변의 강압 혹은 간절한 권유를 이기지 못하여 몇 번의 억지 출석을 했다가 말았다는 사실 두고두고 아쉽게 느껴진다. 오히려 성인이 되고 나서야 문학과 예술에 녹아든 종교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자발적으로 경외하게 되는 순간이 제법 있었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종교를 오래도록 생각하지 않고 지내왔다. 그런데 오늘은 오랜만에 불신자로서  종교에 대해 다시금 궁금증을 느끼게 되었다. 전도 종이를 언 손에 꼭 쥐고 있던, 은은한 미소의 여자가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종교의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나 수고롭고 적극적으로 행동하게 는지 묻고 싶었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당신은 무엇을 전하고 인도하려는 건가요?


좀 전의 내가 물 한 모금 주지 않고 너무 매몰차게 그녀를 쫓아낸 건 아닌가 하는 후회와 함께 그런 궁금증이 들었다.


내일 여자또 몇 집의 현관문을 두드리게 될 것인가.

나는 어설프나마 그녀가 믿는 신께 성실하고 열정적인 당신의 여신도를 부디 축복해주시기를 잠시 빌어보았다.


그녀는 이 도시의 아파트에 자발적으로 찾아온 나의 첫 방문객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