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0.12
"엄마! 이거 쓸래?"
"응, 좋아!"
쁨이가 작은 플래너 하나를 줬다.
안경보다 작고 카드보다 큰 사이즈의 언데이티드 스타일인데 180도 펼쳐지는 제본이라서 아주 마음에 든다. 31주 6개월짜리라서 두껍지도 않다. 손바닥은 물론 가방 이너포켓에도 쏙 들어간다. 메모 용도로 쓸 거라서 들고 다니기에도 부담 없고 처음으로 짐스럽지 않은 수첩을 만난 것 같다. 다 쓰면 또 찾을 것 같아 검색해 봤다. 쪼그만 게 비싸기도 하네. 그래도 어쩌면 또 살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나는 여기에 이런 거 썼거든? 엄마는 어떻게 쓸래?"
"오! 나도 그렇게 쓸래. 어떻게 하는지 알려줘!"
"그럼 일단 지금이 10월이니까 여기에 10월에 하고 싶은 거랑 할 거부터 적어 봐."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 도전하기
5단강 완벽 진입하기
"그리고 여기(모눈 내지)에는 매일 하는 루틴이랑 해야 할 거 적어 봐."
"여기다? 쁨이는 어떻게 적었어?"
"나는 이렇게. 관련 있는 것들끼리 같이 적고 해당하는 칸에 점을 찍은 다음, 나중에 이렇게 선을 이어서 그래프를 그리는 거야."
"아~ 라인그래프 같은 거구나! 오호~ 읭? '살기 싫음' 이거는 뭐야?"
"여기까지가 최하위 컨디션이라서."
"이런 컨디션 단계는 처음 보네. 되게 웃긴다. 괜찮은데? 엄마도 그렇게 적을래!"
모닝루틴(유산균, 푸룬, 올레 or 올커)
운동(40분 또는 최소 10분)
글쓰기(연재 또는 최소 초고)
독서(1시간 이상 최소 20분)
물 마시기(1리터 이상 2리터)
출근(11시 정시, 늦어도 2시 오픈)
퇴근(18시 정시, 빠르면 15시 마감)
-외부 출강 때는 어쩔 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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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컨디션(최고부터 살기 싫음까지 5단계)
업무 일정이 아닌 일상 루틴들을 수기로 적어 보는 건 아주 오랜만이었다. 어릴 적 방학 계획표를 짜던 그때처럼 뭔가 몽글몽글한 기분이 들면서 동심 같은 것도 느껴졌다. 시작은 가벼운 마음이었는데 적다 보니 꼭 해내고 싶고 반드시 이루고 싶고 더욱 잘하고 싶다는 마음 가짐이 몽실몽실 피어났다.
"그리고 여기(위클리 페이지) 일요일에는 오늘 날짜 써."
"오늘 날짜? 왜?"
"오늘 한 거, 할 거 적으면 돼. 나도 그렇게 하고 있어."
"그래? 음...... 엄마는 그렇게 안 할래."
"왜?"
"앞(먼슬리 페이지)에는 글 제목 적기로 했는데 여기다가 다른 거를 적게 되면 글 제목이 여기 와서 뚝 끊기잖아."
"이게 6개월짜리인데, 엄마가 글을 이만큼 다 쓸 수 있어?"
"...... 앞으로의 6개월은 과거가 아닌 미래인데 엄마가 그거를 어떻게 알아. 그날이 안 돼 봐서 엄마는 몰라. 하면 하지 왜 못 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엄마가 못 할 거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엄마가 지금까지 글을 26개 썼잖아. 26개 써서 한 말인데 왜 화를 내?"
쁨이는 방으로 들어갔고. 나는 밖으로 나왔다.
그러게나 말이다. 쁨이가 못됐게 말한 것도 아니고 단순히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이었는데. 왜 그렇게 고깝게만 들은 걸까. 서운한 것도 아닌 울컥이라니. 왜? 왜 그런 건데? 찔려서지. 정곡을 제대로 찔려서야. 초고가 백날 넘쳐나면 뭐 해. 결국 완성된 건 아무것도 없는데. 아무리 본업이 아니래도 그렇지. 생업이 따로 있다기로 서니, 밥은 안 먹어? 놀러 안 다녀? 일어나서 일만 하고 일만 하다 잠드는 거 아니잖아. 이게 어딜 봐서 작가의 꿈을 가진 자세인 거냐고. 누가 봐도 현실성 1도 없는 허황된 꿈만 나불거리는 인간일 뿐인 거지.
부끄럽다. 부끄러워. 오늘은 그런 말을 들어도 싼 날이었다. 더한 일침으로 가격 당했어도 유구무언(有口無言)인 그런 날이었어. 카페에 앉아 호되게 각성하고 결의했다.
보여주리라. 내 꼭 보여주리라. 그 누구도 아닌 내 자식에게만큼은 정연한 거울이 되어주리라. 좀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 더욱 최선을 다해야겠다. 믿고 보고 따라도 되는 반듯한 뒤태가 되어야겠다.
역시 내게는 쁨이의 직설화법이 최고의 직방이다. 나를 해치지 않고도 나의 나태함을 일깨워주는 예리한 칼날 같은. 오늘의 자극제는 기억도 안 나는 불주사 맞았을 때의 충격만큼 겁나 큰 한방이었다.
고마워, 쁨! 엄마 완전 분발할게! 살살 휘둘러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