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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class Oct 03. 2024

좀비가 되고 싶지 않아.

22일

좀비라고 아시지요?

걸신들린 귀신처럼, 육신은 죽어있지만 사람을 잡아먹으로 연달인 존재이지요.


좀비의 존재성과, 영화 같은 그런 성향에 대해서는 허구적인 측면이 많이 있지요. 그렇지만, 좀비라는 존재가 주는 영감은 많은 분야에 적용되기도 합니다.


언젠가, 코로나19가 전이되는 방식이 좀비가 전파되는 속도에 대한 연구 사례를 바탕으로 진행되었다는 글을 봤던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지금을 살아가고 있지만, 정신은 지금에 없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말이에요.


제가 자주 목격하는 경우는 이런 거예요.

매주마다 만나는 손자를 보면서, 지금도 재롱을 떨고 있는 손자를 보면서, 뜬금없이 아이가 기어 다니던 시절에는 참 이뻤는데,라는 말씀을 하곤 하지요.

지금 보고 있는 손자가 귀엽지 않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이의 행동이 어떤 변화를 가지고 온 것도 아닌데, 여전히 할아버지 할머니를 보면서 재롱을 떨고 있고, 그 모습을 보면서 즐거워서 기뻐하는데 뜬금없이 지금 존재하는 아이가 아닌, 과거 존재했던 아이의 모습을 회상하며 그때는 이뻤는데,라는 말을 꺼내는 모습을 볼 때면 저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왜, 지금도 좋은데, 다시 얻지 못하는 과거를 회상하고 그곳에 머물고 싶어 하는 것일까?


부모의 부재를 생각하며, 부모와의 좋았던 추억을 회상하는 것과는 다르지요. 자녀, 또는 사랑하는 누군가의 부재를 생각하며 과거 그들과 좋았던 추억을 회상하는 것과도 다르다고 생각해요.


여전히 존재하며 여전히 좋은 관계에 있는데도 지금이 아닌 과거를 회상한다는 것에서 아이러니를 느끼게 되었지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사람들은 자주 그러는 것 같아요.


지금 맛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 과거 먹었던 더 좋은 음식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지요. 지금의 멋진 풍경을 보면서 과거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경험했던 풍경을 회상하곤 하지요.


이상하지요?

지금 좋은 것을 느끼고 경험하며, 그 관계에 있다면 그것을 충분히 내 것으로 만들어도 될 것인데, 이상하게 그 시간을 과거의 어떤 시점으로 돌리려 한다는 게 말이에요.


지금을 살아가고 있지만, 물리적으로는 지금의 순간에 존재하지만 마음과 정신은 지금에 머물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아요. 안타깝게도 그런 삶을 살아가면서 과연 지금이 행복하다는 느낌을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내일을 위해서 오늘을 준비해야 하는데, 여전히 과거에만 머물러 있다면, 언제까지나 내일은 경험하지 못하고 과거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요?


사람마다 성향의 차이겠지만, 저는 가능하면 지금을 살아가고, 내일과 앞으로를 준비하는 삶을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어요. 과거는 이미 지났고, 바꿀 수 없으니 지금에 충실하고 미래를 바꾸자는 주의지요.


그런 모습이 책장에도 있었던 것 같아요.

학교에 있으면서 내일의 수업을 준비하고, 다음 행사를 계획하면서 그래도 틈나면 지금의 흐름을 찾으려 노력하고, 앞으로의 변화에 대해서 고민하며 살았으니까요. 책장의 책을 정리하다가 그런 흔적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문득, 그런 생각을 했지요. 좀비가 되고 싶지 않다고 말이에요.


좀비라는 존재는 몸은 죽어있지만, 지금의 욕구를 추구하는 존재예요. 바로 육신의 허기라는 것이지요. 허기를 충족하기 위해서 이성적 사고도 없어요. 그저 동물적인 본능, 식탐에 대한 욕구만 있지요.


좀비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클리셰라고 볼 수 있어요. 좀비로 변할 예정이고, 그럼에도 그 존재를 아끼는 누군가는 그를 지키고 있고, 언젠가 상처받은 존재는 좀비로 변하게 되며, 변화하는 존재를 지키던 이는 이미 변한 존재를 죽여야 하는지, 또는 그의 손에 죽음을 당할 것인지 고민하게 되는 흐름 말이에요.


처음 좀비에게 상처를 받으면 아직은 이성의 부분이 남아있어요. 때문에 아직은 상처받기 전의 어떤 존재라고 사람들은 인식하지요. 그렇지만, 상처를 통해서 병균이 몸을 침식하면서 조금씩 이성은 사라지고, 본능이 몸을 지배하게 되지요. 그때부터는 사랑하는 존재고 뭐고 없어요. 그저 식욕에 대한 본능만이 몸을 지배하게 되지요.


식탐의 노예가 된 좀비는 주변 사람들을 공격하지요. 사랑했던 존재, 자신을 사랑하는 존재에게도 말이에요. 자신의 부족함을 충족하기 위한 이유라고 하지만, 그런 행위가 주변인의 생명을 빼앗기도 하지요.


저는 그것을 조금 다르게 봤어요.

좀비처럼 육신은 존재하지만 이성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이성과 사고가 지금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생각을 말이에요.


A부장이 있었어요.

고3 경력이 다년간 있었고, 높은 호봉을 받는 만큼 교직에서 연차가 있는 인물이었지요.

그렇지만, 그가 겪은 고3 담임의 경험은 오래전이었어요. 대입 설명회를 가면, 부장은 본인은 고3 경력이 있으니 듣지 않아도 알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지요. 정작 함께 협의회를 하면 지금의 흐름과는 전혀 다른 방향을 이야기하는데 말이에요. 10년 전 고3 담임의 경험이 여전하다는 믿음 때문인지 모르지만, 몸은 지금을 살고 있으나 그가 가진 지식은 과거 어느 시점에서 멈춰있었지요.


육신은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 책임과 의무는 지금에 있지만 이성과 지식, 내면은 지금에 존재하지 않는 그는 주변인들에게 피해를 주곤 했어요.


최신의 정보로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진학에 도움이 되는 활동과 프로그램을 계획해야 했지만, 여전히 과거에 살아가는 그는 그렇게 하지 못했지요. 아니, 심지어는 자신의 논리를 지키기 위해서 아이들에게 유익한 정보를 전달하려는 행동까지도 못하게 했었지요.


지금을 살아가고 있지만, 지금을 살아가지 못하는 존재였어요.


사람들은 종종 그렇게 생각하곤 해요.

나이가 많으면, 경험이 오래 누적되면 자신이 그 분야에서 최고라고 말이지요.


아니요. 저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요.

만약, 그 논리가 맞다면, 모든 노인정에는 해마다 성인이 나와야 할 것이고, 정년을 바라보는 모든 어른들이 장인이 되어야 할 것이니까 말이에요.


결코, 시간의 흐름에 자신을 맡겨서 자연스럽게 성장한다는 건 극히 드문 일이라고 할 수 있지요.


동일한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는 그 삶을 얼마나 밀도 있게 살아가는가에 따라서 각자 성장의 폭은 다르다고 생각해요.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성장의 폭이 모두 동일한 선에 있다는 것은 아니지요. 각자가 추구하는 가치가 있고 삶의 방향이 있으니까요. 그런 다양성이 세상을 더 아름답게 할 것이니까요.


또 하나는, 삶의 밀도를 높인다고 매일의 순간을 최선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도 아니에요. 삶의 밀도라는 것은 특정 시점의 노력정도를 보고 평가하는 게 아니라, 삶의 전반적인 범위를 바탕으로 측정하는 밀도라고 생각하거든요. 때문에,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열심히 살았다고 이후의 삶을 가볍게 보낸다면, 열심히 살았던 시점이 없으나 정기적으로 지속적으로 모든 삶에서 특정한 밀도를 유지한 누군가의 삶이 더욱 좋은 삶이 될 수도 있겠지요.


저는 밀도 있는 삶을 살고 싶어요.

그 밀도는, 과거 어느 시점의 영광에 사로잡혀 그 시간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삶이 아니라 삶의 전반이, 그리고 내일을 준비하는 지금이 행복한 삶을 살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 때로는 깊이 있는 삶을 살아보고, 때로는 폭이 넓은 삶을 살아보며, 때로는 흐름을 이해하는 삶을 살아가려 노력하지요. 그것이 어쩌면,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이야기를 듣고, 대화하고 공감하는 모든 순간이 아닐까 생각해요.


좀비는 없어요.

그렇지만 좀비처럼 살아가는 사람은 있어요.

그런 존재들의 비중이 줄어들면 좋겠어요.

과거의 분노에 스스로를 가둬두고, 과거의 영광에 자신을 가둬두고, 지금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줄어들면 좋겠어요.


물론, 저 또한 그렇게 좀비가 되지 않게 노력해야겠지요. 오랜 시간 그리고 지속적으로 이렇게 노력하다가 보면, 좀비 영화에서 세상이 무너진 시점에 생존자들이 모이는 것처럼, 저와 같이 좀비가 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한 사람들이 어디선가 제 소리를 듣지 않을까요?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함께 모여서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며 더 좋은 성장을 할 수도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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