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표, 30일
머리를 말리는데 진동음이 들리더군요.
모르는 번호.
10시가 거의 다 된 시간.
무슨 전화인가 싶어 받아보니 전화기 너머에서 정중한 목소리가 들립니다.
-안녕하세요? OOO아빠입니다. 혹시 통화 가능하신지요?
자퇴를 고민하는 아이의 학부모였습니다. 얼마나 고민이 많았는지, 하나뿐인 외동딸이 고등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하니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무거웠을까요? 아이의 아버지는 그런 고민에 술을 한 잔 했었고, 그 답답함을 누구에게 이야기할까 하다가 제게 전화를 했던 것이지요.
그런 전화가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비록, 퇴근 후 쉼의 시간이 방해받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아이의 미래와 지금의 선택을 두고서 고민하는 것이니까요. 무엇보다, 그런 고민을 함께하는 부모가 있다는 생각에 아이가 바르게 성장하리라는 작은 믿음도 생겼습니다.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코로나로 학생들이 등교하지 않는 상황이 연속되었는데, 드디어 등교를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바쁜 하루를 보냈었지요.
등교하는 학년의 수업 준비를 하고, 등교하지 않는 학년의 온라인 수업 준비를 했으니까요.
무엇보다, 오랜만에 학교가 시끌시끌하게 된다는 생각에 설렘까지 느껴지는 하루였습니다.
그만큼 피로도 쌓였던 것 같아요.
씻고, 누워서 언제 잠들었는지 모를 만큼 빨리 의식이 멀어졌으니까요.
새벽시간.
살짝 잠이 깨여서 시간을 확인하려 전화를 봤어요.
부재중 23통. 문자 15통.
잠이 확 달아나더라고요.
시간은 새벽 2시.
무슨 일인가 싶어서 살펴보니, 교장, 교감을 비롯해서 몇몇 부장들에게 전화가 왔었더군요.
문자를 확인하니 등교 예정 학년에서 코로나 환자가 발생해서 등교가 연기되었다고, 등교 예정 학년의 학사 운영을 온라인으로 급하게 바꿔야 한다는 통보였지요.
새벽 2시에 전화는 아니라는 생각에 답문을 남겼습니다.
일찍 잠들어서 전화를 못 받았다고. 다음날 일찍 출근해서 준비하겠다고 문자를 발송했지요. 그리고 다시 잠들려고 하는데 답문이 오더군요.
-저도 일찍 출근하겠습니다. 내일 봐요.
그 밤은 그렇게 뜬 눈으로 보냈습니다.
잠이 달아나더군요.
일찍 잠든 것에 대해서 해명을 해야 하는 상황이 어처구니없었고, 이 새벽까지 답문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느낌에 소름이 돋았고요.
새벽 5시.
결국, 잠들기는 힘들다는 생각에 출근을 했어요.
온라인에서의 교육활동을 준비하니 아침 8시가 되었더군요.
이게 과연 맞는가?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러닝 머신에서 달리기를 하고 있었어요.
하루를 잘 마감했으니, 가볍게 운동을 하고, 샤워를 하고 평안한 밤을 보낼 계획이었지요.
땀이 막 흐르려고 하는데 전화가 왔습니다.
부장님의 전화였어요. 전화를 받으니 무작정 본인의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뭐 하노? 내가 지금 어딘지 아나? 내가 니 동네에 왔는데 어떻게 모를 수 있노? 당장 온나!
일방적인 전화를 받고, 조금 화가 났습니다.
직장 상급자라도 지켜야 할 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요.
막연한 술주정이면 그냥 넘어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단걸음에 달려갔습니다. 어차피 제 몸은 달아올라 있었으니까요.
자리에 가니, 소위 제 줄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 부장이 자리를 마련했더라고요. 나름 조직에서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제가 그들과 좋은 친분을 만들게 하려고 말이지요.
저는 그런 자리가 싫었어요.
무엇을 얻기 위해서, 제가 싫어하는 것을 해야 한다면, 저는 제가 싫어하는 것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거든요.
다행스럽게도 그 자리는 그렇게 지속되지 않았어요. 제게 어떤 영향력을 주지도 않았고 말이지요.
그렇지만, 고민은 하게 되었어요.
언제까지 계획 밖의 일이 발생할 것이고, 언제까지 그 일을 감당하게 될까?
조직을 나왔어요.
그리고 늦은 밤 갑작스럽게 전화가 온다거나, 원하지 않는 자리에 불려 나갈 일은 없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늦은 밤 전화가 오더군요.
아버지께서 그날까지 처리했어야 하는 일이 있는데 잊고 있었다고 말이지요. 잘 준비를 다 했는데, 급하게 옷을 챙겨 입고 부모님께 갔어요. 그리고 그 일을 마무리했지요.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어요.
그런데, 마음은 예전과 다르더라고요.
몸은 여전히 피곤했지만, 그래도 마음은 조금 달랐어요.
아마, 일을 마무리하고 집에 돌아오려 인사하는데 잠깐 스치던 부모님의 안도하는 표정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요.
예상하지 못했던 일은 언제든 발생하겠지요.
그런데, 그 일이 누구를 위한 것인가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그리고 그 일에 대한 수고스러움이 타인보다 가족을 향한다면 그나마 조금 위로받는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늦은 밤 전화가 왔어요.
부모님께서 필요한 어떤 것을 인터넷에서 주문해 달라는 전화였어요. 그냥 일상적인 그런 이야기요.
전화가 울리던 그 순간.
갑자기 과거의 기억들이 떠올랐어요.
늦은 밤 울리는 전화에,
여러 시간 속에서 경험했던 일들이
스치듯 기억 속을 지나가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