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에서 유명으로
꽤 오랜 기간 수학 교사를 희망했음에도 나는 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할 때 진로를 바꾸었다. 순전히 면접을 위해 학원 선생님께서 권유하신 일이었다. 약 9년간 간직해 온 꿈과 내 오른손 약지 사이를 이어주던 끈을 조심스레 당겨보았다. 그 끝에 달려 있던 꿈은 어느덧 바람이 빠져 조그마해진 풍선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서 보내주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한 줌의 헬륨 가스에 내 숨을 함께 불어넣어 하늘로 날려 보냈다.
그 이후로 내가 표면적으로 갖게 된 진로는 신소재 공학이었다. 몇 가지 추천과 권유 속에서 골라냈을 뿐인 생소한 껍데기, 그럼에도 내가 ‘좋아한다’고 말해야 하는 분야. 자소서와 면접을 위해 신소재에 대해 6개월이라는 시간을 공부했다. 나름대로 재미있는 구석도 있었지만 좋아한다고 말하기에는 부족한 애매한 감정과 늘 함께했다.
아무런 색깔 없는 좋아함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나는 늘 면접 학원에서 최상위 평가를 받았다. 그때는 회의감조차 들지 않았던 것 같다. 경쟁의 세계 속에서 내 생존 확률을 부지런히 높여가고 있다는 사실에만 안도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던 그 일요일 오후에도 나는 신소재로 만든 배터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삐비빅. 모의면접 시간을 재던 타이머가 울렸다. 내내 부지런히 무언가 적어 내려가시던 선생님께서 미소 띤 얼굴로 나를 바라보셨다.
“아주 좋아! 너는 워낙 열심히 해서 매주 새로운 소재가 나와서 신선해. 근데 아까 배터리 관련해서 말한 거, 그게 본체랑 분리가 되나? 아니면 일체형으로만 보급되나? “
“저도 그걸 찾아봤는데요, 기사에서는 명확히 언급을 안 해서 사실 잘 모르겠어요. 추가적으로 검색해도 자료가 거의 없어서... 이거 한 번 읽어보실래요?”
“그러게, 이 자료로 봐서는 불명확하네. 나도 신소재 전공이 아니라서 확실히는 모르겠다. “
선생님과 내가 머리를 맞대고 있는 동안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거 일체형일걸요. 저도 논문 찾아봤거든요. “
논문을 찾아봤다고? 누구지, 하는 생각에 뒤를 돌아봤다. 쟤는 평소에 행동 경제학 좋아하던 애 아닌가? 본인 면접 준비하기도 벅찰 텐데 신소재 관련 논문까지 찾아봤다고?
“오, 경제학만 아는 줄 알았더니, 이걸 또 알아봤어? 그 내용은 이따 수업 끝나고 자세히 공유해 주고, 이제 네 모의면접 진행할 테니까 준비해!”
네, 짧은 대답과 함께 그 애와 나는 자리를 맞바꾸며 스쳐 지나갔다.
모의면접 때 학생들이 서로 참관을 하고 코멘트를 적어주는 것이 의무였지만, 면접 태도라면 모를까, 답변 내용에는 서로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모두의 진로가 상이하게 달랐고, 피면접자가 깊이 있게 대답할수록 이해할 수 없는 영역만 늘어났으니까.
그래서 나도 그 애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아는 거라고는 행동 경제학에 관심이 있고, 창업을 꿈꾸고, 영어를 아주 잘한다는 것 정도. 그마저도 그 애가 우리 반에서 나와 함께 손꼽히는 면접 우수자였기 때문에 가진 관심이었다.
본인과 전혀 관련 없을 것 같은 신소재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날 면접 코멘트를 적은 쪽지에 작은 글씨로 몇 줄 덧붙였다.
‘아까 나한테 말해준 배터리 내용 어쩌다 알아봤어? 관심 있었다는 게 신기해서’
그 애는 잠시 쪽지를 내려다보더니 나에게 전해줄 종이에 또박또박 글자를 적기 시작했다.
‘평소에 네가 신소재 얘기 하는 거 듣다 보니까 재밌어 보이길래 조금 찾아봤어 ‘
그때도 지금도 나에게 공부는 의무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 적이 없었다. 재밌어 보였다고? 학문에게 맑고 순수한 관심을 갖는 게 가능한 일이었던가?
쪽지에서 시선을 돌려 그 애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날이 내가 그 애의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게 된 날이었다. 같은 학원 학생에서 고유 명사 세 글자로 남게 된 날, 무명에서 유명이 된 순간.
나도 그 애도 말수가 많은 성격도, 붙임성이 좋은 성격도 아니라서 그날 이후로 특별히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다. 다만 나는 그 애의 모의면접에 집중하게 되었고, 그 애가 평소 내 언어에 경청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을 뿐이었다.
행동 경제학 내용도 듣다 보니 재밌었다. 그 애가 자주 언급하던 책은 <넛지>였다. 소설이나 에세이류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제목만 알고 있던 경제학책이었지만 어느 순간 따라 읽고 있었고, 곧 좋아하게 됐다.
‘나 <넛지> 샀다. 너 따라서 읽고 있어. 아직 많이는 못 읽었는데 재밌더라.’
언젠가 내가 코멘트 종이에 작게 눌러 적은 한 줄을 보더니 그 애는 희미하게 웃어 주었다. 서로 늘 그 정도 거리에서 응원했던 것 같다. 쪽지에 작게 적은 몇 글자 정도의 마음으로, 모의면접 때 집중하며 들어주는 눈빛으로.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되니 신소재에도 조금씩 흥미를 붙여갔다. 그 애가 또다시 궁금증을 가지고 검색해 보면 좋겠다, 그 애 말고 다른 사람에게도 이 내용이 한 번쯤 흥미롭게 들리면 좋겠다. 신소재 공학이라는 묶음 말고, 소재 각각의 이름이 한 번쯤은 누군가의 머릿속에 기억되기를 어느 순간 바라고 있었다. 붉은색도 분홍색도 아닌 연한 노란색 정도의 애정.
그 애 말고 다른 학생들의 면접도 그즈음부터 열심히 들었다. 이전에는 내 자료 외우기에 급급해서 귀에 들어오지 않던 내용들이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빅데이터, 건축, 논리학 등등 세상에는 내가 보지 못하던 수많은 이름이 존재했다. 단순히 문이과 구분 말고, 국어 수학 영어와 같은 구분 말고, 한 층 아래의 더 세부적이고 고유한 이름들. 그 이름들이 자신에게만큼은 너무도 특별하다는 듯이 말하며 반짝이는 눈빛들도 그제야 마주하게 되었다.
그렇게 반년은 빠르게 지나갔고 마지막 수업이던 크리스마스 날, 우리가 주고받던 코멘트 종이는 짧은 인사로 끝이 났다.
‘파이팅. 너라면 붙을 거야.’
‘면접 잘 봐’
내가 원하던 학교에 합격하던 날, 면접 학원 선생님께 소식을 알리며 그 애의 근황도 조심스레 물었다. 친하다고 말하기에는 어려운 사이였기 때문에 직접 연락하는 건 부담이 있었다. 다행히 그 애도 본인이 원하던 학교에 합격했다는 희소식이 들려왔다.
그 해 겨울을 내가 입학할 학교에 대해 무수히 기대하고 상상하며 보냈다. 그 애와 비슷한 사람들이 많이 있겠지. 학문이 공부라는 카테고리로 뭉뚱그려지지 않는 사람들. 학문에서 뻗어 나온 가지 하나하나에게 애정을 담아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들. 어느 날 저 애가 나에게 이름을 가지게 된 것처럼, 김춘수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고등학교 입학 전 그 애를 만남으로써 이미 내 세계는 확장되기 시작했다. 언젠가 나도 내가 맑은 색깔로 좋아할 수 있는 것을 찾게 되면, 우리가 혹시라도 학교 간 연합 포럼에서 만나게 되면 그 색이 무엇인지 제일 먼저 보여주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그런 기회는 가지지 못한 채 나도 그 애도 졸업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내가 입으로만 되풀이하던 색깔 없는 좋아함에 물감을 한 방울을 담아주어서, 이미 너무나도 다양한 색으로 빛나고 있는 너의 좋아함을 보여주어서 고맙다고 늘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