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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주 대신 지팡이!

by 에세이스트

옛날 먼 길을 떠나는 이들은 고된 산길과 험한 고개를 넘기 전에 반드시 잠시 멈춰 쉬어가야 했다. 그 길목마다 자리한 주막은 단순한 술집이 아니라, 여행자가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고 다음 여정을 준비하는 소중한 쉼터였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전국 각지에 퍼진 주막은 탁주와 음식을 내놓으며, 고개 넘어가기 전 마지막 안식처가 되어 주었다. 그래서인지 자작나무 숲을 향해 오르는 길 중반 즈음, 막걸리 한 잔 하고 가야 한다는 이야기가 자연스레 이해되었다.



심하게 가파르다거나 산세가 험해서 숨이 막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도시 생활에 익숙해진 내 몸엔 언덕을 오르는 일이 꽤나 성가셨다. 조금씩 무릎이 아파오고, 시원한 맥주 생각이 간절해졌다. 덥고 땀이 나서 갈증이 나는 건 아니었지만, 무거워진 허벅지를 들어 올리는 게 버거웠다. 게다가 장딴지마저도 땡겼다. 약간의 알코올 기운이라도 있다면 힘든지도 모르고, 차라리 기분 좋게 오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보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래서 고개 넘어가기 전 주막에 들러 탁주 한 잔 마셨나. 사실 이곳에 오기 전, 지인에게서 "숲에 오르기 전, 가볍게 한 잔 정도 하고 올라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지나친 과음이 아니라, 딱 한 잔. 지금은 조선시대도 아니건만, 예나 지금이나 고된 일 앞에서 음주로 위안을 삼고자 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나 보다.



탁주 대신 지팡이!

지금 이곳은 강원도 인제 자작나무 숲이다. 긴 추석 연휴에 첫 날 방문을 계획했었다. 입구에서 왕복 3시간 걸린다는 안내원의 말이 사실임을 오르막길을 오르며 절실히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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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자, 초입에서 나눠준 자작나무 지팡이에 온 체중을 더 실었다. 쉬엄쉬엄 가라며 안전을 기원하는 그 지팡이는 처음엔 장식품처럼 느껴졌지만, 점점 내 몸을 지탱하는 든든한 친구가 되어 주었다.



힘든 내 옆을 힘찬 걸음으로 앞질러가는 어르신은 "조금만 힘내! 곧 평지가 나올거야. 지금은 힘들지만, 도착하면 또 오고 싶을 걸"이라며 가볍게 웃으며 지나갔다. 그 말이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정상이 내 손에 들어온 듯, 기대를 품으며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드디어 정상 도착, 숲에 들어선 순간 차가운 공기가 온몸을 감싸 안았다. 하얗고 곧게 뻗은 자작나무 줄기들이 빽빽하게 서 있었고, 고요함이 숲을 가득 채웠다. 바람에 나뭇잎이 살짝 흔들릴 때마다 하얀 나무껍질이 은은하게 빛났다. 손끝에 닿는 나무껍질은 매끈하고 시원해, 마치 오래된 친구를 만난 듯한 따뜻함과 차가움을 동시에 전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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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는 주로 한반도의 북부와 고산지대에서 자라는 나무로, 특히 강원도 인제처럼 해발이 높고 기온이 낮은 지역에서 잘 자란다. 서울과 같은 중부 이남 지역에서는 기후가 상대적으로 따뜻하고 도시화가 진행되어 자작나무 숲을 보기 어렵다.


하얀 껍질과 곧은 줄기, 그리고 맑은 공기를 품은 숲이다. 그래서인지 이 숲에 들어서면 저절로 마음이 하얗게 정화되는 기분이 든다. 도시의 피로를 씻어내는 치유의 공간이랄까나. 힘든 길을 오르는 동안 쌓였던 몸과 마음의 피로가 조금씩 벗겨지고, 숲은 말없이 나를 품어주었다.



먼 옛날 고개 넘기 전 주막에서 한 잔의 탁주로 힘을 내던 여행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목적지를 향해 가던 중 산새에서 만나는 여러 자연의 절경들 앞에서, 육체의 피로와 마음의 무거움이 말끔히 씻겨 사라졌으리라. 아마도 그때의 여행자들도 이런 기분이지 않았을까.


지금의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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