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에라는 별들이 아직 남아있는 새벽에 눈이 떠졌다. 동이 트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던 날이었지만 막상 닥치니 긴장이 되었다. 하에라는 침대에서 내려와 가운을 걸치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멀리 붉은 기운이 조금씩 올라오고 있었다. 오늘 하루만큼은 자신만을 위한 날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완벽해야 했다.
다른 날과는 달리 가족 식탁에는 바론과 힐조 하에라 뿐이었다. 소화가 잘되는 수프에 부드러운 빵을 찍어 먹고 따뜻한 우유를 한잔 마신 하에라는 성의 중앙으로 나가는 문 앞에 섰다.
근위대장인 무들과 아란이 도열해 있는 기병대 앞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에라는 망토를 두른 채 그들에게 나아갔다. 무들과 아란, 그리고 기병대는 일제히 바론과 하에라를 향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윤기가 흐르는 하얀 털을 가진 말 옆에 받침대가 놓였고, 하에라는 아란의 손을 잡은 채 말에 올랐다. 이어 바론도 자신의 말 위에 올라 하에라 옆에 섰다.
기병대가 들어 올린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자 출발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울려퍼졌다. 바론은 따뜻한 미소를 하에라에게 보냈다. 긴장한 모습을 감추려 하에라도 활짝 웃어 보였다. 뒤를 돌아보는 하에라의 시선이 힐조에게 한참 머물렀다. 힐조는 웃으며 손을 한껏 흔들어주었다. 하에라는 자신과 바론의 딸이었다. 당연히 당당히 귀환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아란과 무들이 앞서 출발했고, 바론과 하에라를 사방에서 감싸는 모양을 취한 기병대가 그 뒤를 따랐다.
하슬라는 2층 도서관에서 그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자로 잰 듯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제자리를 지키는 기병대가 체스판을 연상시켰다. 그 광경이 너무 멋졌지만 동시에 너무 슬펐다. 오늘은 가족식사자리에조차 함께 할 수 없었다.
하슬라는 기병대의 끝자락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아란의 모습이 사라질때까지. 이 일이 끝나면 아란과 다시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하슬라는 자연스럽게 정원을 향하기 시작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정원에 가보지 않았지만, 사실 하슬라는 그날의 감정을 다시 느끼게 될까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분노와 짜증을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제나 덕분에 가라앉혔던 감정이 다시 깨어나게 둘 수는 없었다.
성벽을 마주한 하슬라는 잠시 숨을 골랐다. 어차피 지금 여기에 아란은 올 수 없다. 오로지 제 감정에 충실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성벽 틈으로 들어간 하슬라는 넓어진 입구를 보고 당황했다. 그리고 자신의 눈앞에 놓여진 의자와 테이블을 발견하고는 심장이 내려앉았다. 하슬라는 천천히 다가가 수놓아진 쿠션을 살살 쓸어보았다. 자신이 상상했던 풍경이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아란이 기억하고 있었어.'
하슬라의 입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제 친구를 하에라에게 뺏겼다고 생각한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하슬라는 쿠션을 꼭 껴안은 채 의자에 앉아 한참 동안 햇살을 즐겼다.
높은 산은 아니었지만, 대규모의 인원이 이동하다 보니 시간이 지체되고 있었다. 산 중턱에 있는 왕의 별장에 도착했을 때는 점심시간이 지나 있었다. 허기져 있는 사람들을 위해 먼저 출발한 제나와 주방 시녀들이 점심식사를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힘들지 않았니? 하에라."
"아니에요. 아버지. 출발할 때는 걱정도 되고 긴장도 됐는데, 막상 와보니 기대가 되는걸요."
"허허. 다행이구나. 많이 먹거라.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니."
바론은 무거운 임무를 짊어진 어린 딸이 안쓰러워 제 앞에 놓인 고기를 하에라에게 덜어주었다. 하지만 기대된다는 하에라의 말은 진심이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하에라는 즐기고 있는 듯 보였다.
식사 시중을 들던 제나는 바론과 하에라가 식사를 끝내고 방으로 들어가자, 기병대에게 가보았다. 한창 먹성이 좋을 청년들이라 음식을 계속 가져다주어야 했다. 하지만 아란은 제 앞에 놓인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바라만 보고 있었다.
"도련님,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세요?"
"어? 아니. 아주 맛있어. 그냥 좀 피곤해서 그런가 봐. 제나, 음식 만들어줘서 고마워."
"다른 음식을 가져다드릴까요? 저녁때까지 힘드실 텐데요."
"아니야. 괜찮아."
순간 아란은 하슬라가 몹시 그리워졌다. 정원에는 가 보았을까? 편지라도 남기고 올 걸 하고 후회하던 찰나 무들이 와서 아란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하에라 아가씨의 첫 의식에 너를 꼭 대동하고 싶었다. 이제 곧 후계자가 되실 분이니 옆에서 극진히 모셔야 한다. 다 먹었으면 어서 아가씨를 모시러 가보거라."
아란은 먹던 그릇을 팽개치듯 내버려두고 칼을 들었다. 오늘 하루만큼은 하에라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별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자 하에라가 단장을 마치고 차를 마시고 있었다.
"아란, 이리로 와서 같이 마시자. 여기에 앉아."
"그렇게 할 순 없습니다."
가까이 다가오지 않고 멀리 서 있는 아란을 보고는 하에라는 주위에 있던 시녀들을 물렸다.
"이제 됐지?"
아란은 마지못해 가장 멀리 있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엉거주춤 불편한 자세로 차만 홀짝이는모습이 하에라의 눈에 꽤 귀여워 보였다. 긴장을 풀어준다는 차를 마시던 탓이었을까. 반투명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따뜻한 빛 때문이었을까. 하얀 피부 위에 놓인 큰 눈과 높게 솟은 코 아래 크지만 두껍지 않은 입술이 선홍빛을 띠고 있었다. 하에라는 그 얼굴을 수백 번도 더 보아왔지만, 오늘은 왠지 낯설게 느껴져 계속 훔쳐보았다. 2살 더 많다고는 하나 어렸을 때부터 자주 보며 친구처럼 지내왔던 아란이었다. 한데 왜 오늘, 하필이면 지금 아란이 눈에 들어온 것일까.
"준비 다 되었습니다."
갑자기 들어온 시녀의 말에 아란이 벌떡 일어나 하에라의 뒤편에 섰다. 시녀는 빠른 걸음으로 하에라의 드레스를 잡아 주었다.
'이제 시작이구나. 휴'
남몰래 한숨을 내쉰 하에라가 걸음을 옮겼다. 문 앞에는 바론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론은 하에라의 손을 살며시 잡아 제게 팔짱을 끼게 했다. 산꼭대기에 있는 제단까지는 계단으로 올라가야만 했다. 하에라와 바론이 앞장 서고 무들과 아란, 그리고 시녀 몇 명만 뒤를 따랐다.
대리석으로 만든 제단에는 양털로 만든 카펫이 깔려 있었고 하에라는 신발을 벗고 그 위에 무릎을 꿇었다. 바론의 지시에 따라 하늘에 계신 조상들께 기도를 올린 후 눈을 감았다.
'별다른 방법이 있는 게 아니란다. 마음속으로 온 힘을 다해 비를 내려야 한다는 염원을 담아 기도하면 된단다. 넌 비를 내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태어났단다. 그저 마음 가는 대로만 하렴. 이 아비도 그렇게 시작했었단다.'
바론의 말이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하에라는 마음으로 구름을 모으기 시작했다. 가슴 속에 한가득 구름이 가득 차오르자, 온 몸이 열기로 뜨거워졌다. 견뎌야 한다. 그렇게 자신을 달래던 하에라의 온몸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호흡이 빨라지고 가슴이 답답해져 와 이대로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할 때쯤 하늘에서 비가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많은 비는 아니었지만 대지를 충분히 적시고 강물을 찰랑거릴 수 있게 하는 비였다.
그대로 쓰러지는 하에라를 아란이 재빨리 뛰어가 받쳐주었다. 눈을 뜨지 못했지만, 숨소리가 나쁘지 않았다. 아란은 하에라를 업고 별장까지 뛰어 내려왔다. 모두가 하에라를 걱정하고 있었다.
"아마 며칠 동안은 이렇게 잠들어 있을 것이야. 몸에 남아있는 에너지를 모두 끌어모아 썼으니. 기운이 없을 테지. 나도 그랬으니………."
바론은 하에라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그녀의 손을 꽉 쥐고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제 자신이 갔었던 그 길을 제 딸이 가려는 것이다. 다행히 하에라는 자신보다 강한 아이였다. 왕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던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제나, 하에라를 부탁하네. 힐조가 있다고는 하지만, 내일은 성으로 돌아가 보는 게 좋겠어."
"네. 폐하. 아가씨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잘 돌볼 테니. 하에라 아가씨 계승식 준비도 하셔야죠."
"그래. 자네만 믿네."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 하에라를 데리고 성으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여기에서 머무르게 하는 편이 낫다는 판단이었다. 바론은 뒤돌아 나가려다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제나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아직 소원을 말하지 않았어."
"네?"
제나는 순간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가 재빨리 다시 숙였다. 기억하고 있었구나.
"아직 내가 힘이 있을 때 말하는 게 좋을 텐데. 다음 시대가 오고 있어."
바론은 씁쓸한 웃음을 흘린 패 밖으로 나갔다. 제나는 바론이 생각보다 빨리 양위를 하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다.
"넌 여기서 아가씨를 지켜드리거라. 기병대의 절반을 놓고 가겠다."
"네, 대장님."
아란은 멀어져 가는 바론과 무들의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막연하게나마 상상해 보았었던 앞으로의 삶이 현실로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아란은 하에라가 잠들어 있는 방으로 들어가 보았다. 제나가 식은땀을 흘리는 하에라의 얼굴을 쉬지 않고 닦아주고 있었다. 간간이 입술 사이로 물을 흘려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란은 방으로 들어가는 대신 방문 앞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는 앉아서 등을 기댔다. 고단한 하루였다. 눈꺼풀이 뻑뻑해져 오고 있었다.
제 기분대로 제멋대로 행동하는 아이인 줄만 알았던 하에라가 오늘만큼은 어른스러워 보였다. 오히려 자신이 기분조차 주체하지 못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무사가 되기 싫다고 징징대는 자신과는 달리 하에라는 주어진 임무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학자가 되겠다는 희망은 한낱 꿈에 불과한지도 몰랐다.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아란은 잠시 눈을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