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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슬라 27화

by 백서향

하에라가 눈을 뜨고 제일 먼저 마주한 사람은 아란이었다. 제나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아란이 침대 곁을 지키고 있었다. 사흘 만에 깨어난 하에라는 아란을 보자 무척이나 기뻤다. 자신을 보고 빙긋이 웃어주는 그를 하에라는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아직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누워 있어."


그래도 하에라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아란은 하에라의 등을 팔로 감싸서 지탱해 주었다. 다정한 말투와 자신을 배려하는 몸짓까지. 하에라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고생 많았지? 아니, 고생 많으셨어요."


"우리 둘이 있을 때는 괜찮다고 했잖아. 아란."


"너 되게 어른 같았어. 멋있었고. 조금 부럽기도 하더라."


"정말? 나도 생각보다 힘들었지만 이제 정말 아버지의 후계자가 된 것 같아 뿌듯했어. 비가 한 방울씩 떨어지는데 가슴이 막 터질 것 같더라고."


"깨어나셨네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식사 올리겠습니다."


하에라는 즐거운 대화 중 들어온 제나가 거슬렸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왜 안보이시는 거지?"


"폐하께서는 먼저 성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저에게 아가씨를 돌보라 명하셨고, 여기 아란 도련님께 호위를 맡기셨습니다."


"그럼 이제 우리도 성으로 돌아가야겠지?"


"폐하께서 몸이 완전히 회복된 후에 돌아오시라 하셨어요. 처음이라 몸이 많이 상하셨을 거라고."


하에라는 대답 대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짧지만 어지러움이 밀려온 탓이었다.


"나 다시 누워야겠어."


아란이 일어나 다시 하에라의 몸을 받쳐주었다. 그러고는 제 소매로 그녀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었다. 아란은 하에라가 완전히 회복할 때까지 그녀 곁에 머물러 있었다. 식사할때도 잠들었을 때조차도. 자신의 임무에 충실히 임하고 있었다.



성 안의 모든 사람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하에라가 드디어 돌아온다는 전갈이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그건 곧 아란과 제나도 돌아온다는 의미였다. 정원에서 병든 닭처럼 누워만 있던 하슬라의 눈에 생기가 돌고 있었다.


하슬라는 하에라가 좋아하는 디저트들을 준비할 작정이었다. 고생한 피붙이를 위해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그리고 같이 고생한 제나와 아란을 위해서도. 하슬라는 과수원으로 달려가 복숭아를 따고 숲으로 들어가 산딸기를 따왔다. 복숭아는 예쁘게 깎아 병조림을 만들어 놓았고, 산딸기는 설탕을 넣고 약한 불에 조려 놓았다. 밀가루에 설탕과 버터 조각을 넣고 빠르게 뭉친 후 밀대로 밀어 얇게 펴고는 타르트 틀에 맞게 성형을 했다. 1차로 화덕에 구워낸 쉘이 식는 동안 우유에 설탕과 계란 노른자를 넣어 끓인 커스터드 크림을 만들어 놓았다. 쉘 안에 크림을 가득 넣은 후 복숭아를 얹고 산딸기 조림을 얹어 타르트를 완성 시켰다. 제나 없이 만든 첫 타르트가 보기 좋게 나와서 하슬라는 기분이 더욱 좋아졌다. 타르트들을 예쁘게 포장한 후 한쪽에 치워놓고는 방으로 달려가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하에라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나팔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하에라는 개선장군 못지않게 당당한 걸음으로 성안으로 들어와 바론과 힐조의 품에 안겼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주위 사람들은 모두 존경 어린 박수를 보내며 따뜻한 미소를 보였다. 하슬라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그 자리에 있을수는 없었지만, 오늘만큼은 마음으로나마 하에라에게 따뜻한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하슬라는 타르트 하나를 제나의 방에 놓아둔 후 정원에 있는 테이블에도 하나를 올려놓았다. 그리고 넓은 은쟁반에 조각을 낸 타르트를 하얀 접시 위에 올리고는 뜨겁지 않게 우린 자스민차와 함께 들고 주방을 나섰다.


똑똑똑


"들어와."


두 손으로 쟁반을 쥐고 있던 하슬라가 문을 열지 못하고 난감해하고 있는데 안에서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잘됐다 싶던 하슬라가 그 문을 연 사람이 아란이라는 걸 보고는 잠시 놀랬지만 그대로 쟁반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고생했어. 하에라. 네가 좋아하는 타르트를 좀 만들어봤어."


하슬라는 하에라가 앉기를 권할 때까지 서서 기다렸지만, 하에라는 타르트를 볼 뿐이었다. 자신의 자리에 앉으려던 아란이 엉덩이를 살짝 대고는 바로 다시 일어나 하슬라를 바라보았다. 어정쩡하게 서 있던 하슬라가 손가락들을 얽어매며 비볐다. 비슴듬히 앉아 있던 하에라가 드디어 몸을 일으키고는 포크를 들어 입안 가득 타르트를 베어 물었다.


"와, 정말 맛있어. 너도 먹어봐 아란. 최고야. 하하하."


하에라의 웃음소리가 기분 좋게 응접실 안을 가득 메웠다. 하지만 하슬라가 기대에 차서 잊고 있던 것이 있었다.


"그런데 이 맛 어디서 먹어본 맛인데. 맞아! 그럼, 지난번 타르트도 하슬라 네가 만들었던 거였어? 난 그것도 모르고 제나에게 상을 내렸네. 옷은 하슬라 네가 받아야 했구나. 지금 그 옷 좀 그렇네."


말하는 당사자는 악의 없이 뱉는 말이었지만 상대방의 마음을 짓이기는 저 말들.


'난 네 아랫사람이 아니야. 나도 아버지의 딸이라고. 네게 그런 취급을 받을 이유는 없어.'


하슬라는 목을 타고 넘어오는 울음을 넘기느라 입술이 떨려왔다. 차마 밖으로 내지 못한 말들이 한 번에 쏟아질까 서둘러 방에서 나가는 하슬라를 하에라는 의아한 눈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아란은 안절부절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하슬라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고 입술이 떨리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결국 잠시 자리를 비우겠다는 양해를 구한 아란이 하슬라를 찾기 위해 정원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곳에 하슬라가 없었다. 방문을 두드려보고 살짝 열어도 봤지만, 그곳에도 없었다. 도서관에도 응접실에도 과수원에도 하슬라는 보이지 않았다. 성안을 몇 번이고 돌아봤지만, 하슬라는 찾지 못한 아란은 무들이 찾는다는 소리를 들은 후에야 포기하고 돌아섰다.


하에라의 방을 나온 하슬라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눈을 비벼보았지만, 앞이 잘 보이지 않았던 하슬라는 바론의 집무실에서 나오던 제나와 부딪히고 말았다. 제나는 품에 안겨 서럽게 우는 하슬라를 달래 자신의 방으로 데려갔다.


"어머 아가씨, 나 주려고 이렇게나 예쁜 타르트를 만든 거예요? 음, 이거 너무 맛있다. 내가 만든 것보다 훨씬 맛있는걸요. 아마 이 왕국에서 제일 맛있을 거예요."


제나는 하슬라의 눈물을 멈추게 해줄 요량이었지만 한번 터진 눈물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불쌍한 우리 아가씨. 모아놨던 눈물 오늘 다 흘릴 작정인가 보네."


제나는 수건을 가져와 하슬라의 얼굴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하슬라는 이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그동안 잘 참으셨잖아요. 하에라 아가씨 때문에 속상한 거 하루이틀도 아니고. 오늘따라 이상하네."


눈물을 멈추고 싶은데 멈춰지지 않았다. 그냥 넘기면 될 일이었는데. 하에라 말에 악의가 없다는 건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아는데 오늘따라 왜 이럴까. 그저 빨리 이 눈물을 멈추고만 싶었다. 몸에 기운이 너무 없었다.


제나는 하슬라를 제 무릎 위에 눕히고 어깨를 쓸어주었다. 왜 항상 하에라는 웃기만 하고 하슬라는 울기만 해야 하는 것일까. 제나는 하슬라를 웃게 해주고 싶었다. 아무래도 바론에게 소원을 말할 때가 온 것 같았다.



"안돼! 그건 절대 안 되는 일이야."


하슬라가 잠든 걸 확인한 후 제나는 바론의 집무실로 향했다. 다행히 바론이 침실로 가기 전이었다.


"소원을 들어주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한번은 들어주신다고."


제나는 안될 줄은 알았지만 바론이 이렇게까지 불같이 화를 낼 줄은 몰랐다. 그래서 오기가 생겼는지도 몰랐다. 감히 왕에게 큰소리를 내고 말았다.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는 성안에서 지내야 한다. 왕가의 전통에 따라 결혼한 후에야 성에서 나갈 수 있다는 걸 너도 잘 알지 않느냐."


"하지만 하슬라 아가씨는 다르지 않습니까? 제가 잘 돌봐드리겠습니다. 죽은 듯이 살 테니 제발 같이 내보내 주세요."


제나는 바론 앞에 엎으려 빌었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하슬라의 울음소리가 자꾸 귓가를 맴돌았다.


"너를 내보내 줄 수는 있다. 원한다면 살 곳을 마련해 줄 수도 있어. 하지만 하슬라는 안된다. 왕가의 전통을 깰 수는 없는 일! 그만 나가보거라."


바론은 제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제나는 바론을 너무나 잘 알았다. 그의 대답이 바뀔 일은 평생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대로 물러나 나왔다. 주방 옆에 딸린 자신의 방에서 밤새 하슬라를 지켜주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새벽 동이 터오는 것을 보고 겨우 잠든 제나가 일어났을 때 하슬라는 방에 없었다. 놀란 제나가 제일 먼저 주방으로 뛰쳐나갔다.


"일어났어? 피곤할 텐데 더 자지 그랬어?"


해맑게 웃으며 자신을 보는 하슬라가 너무 낯설었다.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걸까.


"페하와 아침 식사 잘 끝내고 온 거니 그런 눈으로 안 봐도 돼. 나 괜찮아. 정말로."


제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수프를 먹고 있었을 바론과 하슬라를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하슬라가 아버지를 닮은 구석이 있긴 했구나.


"빨리 들어가서 더 자라니까. 난 만찬에 쓸 디저트 재료들을 손질하고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


하슬라의 손에 떠밀려 다시 방에 들어간 제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저 안에 뭐가 들어있길래.


하슬라는 보늬 밤을 만들기 위해 밤을 주우러 숲으로 들어갔다. 작대기를 가져가긴 했지만 여기저기 밤들이 많이 널려있었다. 등에 멜 수 있는 바구니를 가져간 덕분에 수월하게 밤을 잔뜩 가져온 하슬라는 시녀들에게 맡기지도 않고 밤껍질을 직접 까기 시작했다.


어제 일을 마음에 담아 둘 필요는 없었다. 숱한 일상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눈물을 보이고 만 것이 후회스러웠지만 앞으로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겉 껍질을 벗은 밤이 까슬까슬해졌다. 뜨거운 물에 데쳐내자, 속껍질이 부들부들해졌다. 이번에는 설탕을 섞은 물에 밤을 넣고 조리기 시작했다. 걸쭉해진 설탕물이 밤껍질 사이로 스며들었다. 이렇게 만들어 놓은 보늬 밤으로 몽블랑 케이크를 만들 예정이었다. 하에라의 계승식에 딱 맞는 케이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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