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승식이 시작되면 바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하에라를 떠받들게 될 것이다. 힐조나 하슬라조차도 그녀 앞에서는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이제 하에라는 왕이 수행하는 모든 일을 함께할 터였다. 그리고 스무 살 되면 왕이 정해준 남자와 결혼 해야 했다. 다음 왕위를 이을 후사를 단단히 하기 위함이었다.
하에라가 만찬장에 나타나자 모두 일제히 숨을 죽였다. 짙은 파랑색 머리카락에는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왕관이 빛나고 있었다. 하에라가 난간에 손을 살짝 올리고는 계단을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왕관에 어울리는 은빛 드레스가 하늘하늘 춤을 추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비의 날갯짓이 그만큼 우아할 수 있을까. 하에라의 귀에서 흔들리고 있는 진주조차 그것을 알고 있는 양 부드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계단을 모두 내려온 하에라는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바론의 손을 잡았다. 힐조는 그 모습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힐조는 하에라가 태어났을 때 아들이 아님에 실망하지 않았다. 어미도 모르는 하슬라가 나타났을 때도 흔들리지 않았다. 누구보다 강한 자신의 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딸 하에라를, 나의 뒤를 이어 이 나라를 이끌어 갈 후계자로 선언하노라!"
바론이 축배의 잔을 들어올리자, 축하의 함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창밖으로 터지는 불꽃들이 밤하늘을 가득 채웠고, 만찬장 사람들의 입에서는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
하에라를 호위하고 있던 아란도 진심으로 그녀를 축하해주고 있었지만, 만찬장에 놓여있는 몽블랑 케이크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하슬라.'
아란은 주방으로 가면 하슬라를 만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여러 번 찾아가 보았지만 번번히 그녀와 어긋나고 말았다. 지금이라도 가면 만날 수도 있겠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내치고 나갈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어서 이 행사가 끝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아란! 어딜 보고 있어!"
결국 무들에게 한 소리를 들은 아란은 바론과 힐조, 하에라가 앉아 있는 자리에 불려 갔다.
"근위대장께 부탁할 일이 있네만."
"명령하십시오!"
"아란에게 특별 경호를 맡기고 싶네."
"하지만 폐하, 제가 그렇게 큰 임무를 맡기에는 아직 어리고 경험도 부족합니다."
당황한 아란이 폐하께 직접 아뢰었지만, 바론은 오히려 흡족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지금까지 하에라를 호위해 준 것과 다를 게 없을 것이야. 단지 직책을 높여주고 더 많은 권한을 주는 거란다. 하에라를 경호하려면 그에 따른 대우를 해줘야 하는 게 당연하거늘."
"감사합니다. 폐하."
무들은 가만히 있는 아란을 대신해 고개 숙여 대답했다. 이번 일만 끝나면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아란은 낭패감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무들이 아무도 없는 곳에 이르자 아란을 한 손으로 들어 바닥에 내팽개쳤다. 폐하 앞에서 그런 태도를 보일 때부터 예상했던 일이었다. 다시 옛기 억이 떠올라 아란의 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이제 아버지와 겨뤄도 이길 수 있을 힘을 가졌지만, 아란은 반항조차 하지 못했다. 마치 울타리에 갇혀 살던 사자가 문이 열렸는데도 도망치지 않는 것처럼.
아란은 무들의 분이 풀릴 때까지 맞고 또 맞았다. 날아드는 의자를 피할 생각도 없었다. 아란이 커 갈수록 횟수는 줄어들었지만, 강도는 높아졌다. 칼을 빼어 들지 않는 아버지에게 감사라도 해야할 지경이었다. 아란이 무들을 막아선다면 과연 저 칼을 겨누게 될까. 아란은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렇게 된다면 자신도 아비에게 칼을 겨눌 수 있을까.
아란은 갑자기 하슬라가 보고 싶었다. 그래서 앞뒤 잴 것도 없이 성으로 말을 몰아 달려갔다.
하슬라는 재스민 꽃잎을 찻잔에 띄웠다. 향기가 좋아서 마시기도 하지만 재스민을 마시면 각성효과가 생겼다. 열려있는 창문으로 바람이 솔솔 불어오고 있었다. 하슬라가 이 성이 마음에 드는 유일한 이유였다. 성 어디서든 따뜻한 햇살과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는 창이 수없이 많았다.
하슬라는 만찬이 끝나고 손님들이 다 돌아간 후에도 주방에 남아있었다. 아마도 공식적으로는 이곳에서 일하는 마지막 날이 될 터였다. 제나의 부탁에 진노한 바론이 하슬라를 집무실로 불러들였다.
"네가 나가겠다고 했니?"
바론은 앞뒤 설명도 없이 하슬라에게 물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폐하."
영문을 모르겠다는 하슬라의 얼굴을 보고서야 화를 누그러뜨린 바론이 예전처럼 하슬라의 눈높이에 자신의 몸을 낮추었다. 그리고 그녀의 두 손을 조심히 감싸 쥐면서 부드러운 저음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얘야, 미안하지만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주방일을 해도 된다는 약속은 지키지 못할 것 같구나. 대신 도서관에서 책을 정리하는 일을 해주어야겠다. 원래도 너에게 그 일을 맡길 예정이었는데 잠시 잘못 판단한 것 같구나."
"네, 폐하.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번에도 제게 큰소리를 낼 것이라 예상했던 바론은 순순히 대답하는 하슬라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고맙구나. 이제 하에라가 후계자가 되었으니, 때가 되면 너에게 알맞은 지위를 부여해 줄 것이야."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폐하."
바론이 했던 모든 말을 재스민 차에 녹여 입안으로 흘러 넣었다. 그 때가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에게 맞서는 대신 하슬라도 때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단지 그 때가 바론의 때와는 많이 다를 것이었다.
"하슬라!"
주방 문이 덜컥 열렸다. 정원으로 가려던 아란이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주방으로 곧장 달려왔다. 하슬라는 너무 놀란 나머지 재스민차를 앞치마에 쏟았다. 급한 손길로 앞치마를 털고 있는 하슬라의 눈에 밀가루에 얼룩진 소매와 반죽이 덕지덕지 붙은 치마가 보였다. 앞치마는 과일즙으로 얼룩져 있는 데다 방금 쏟은 누런 차 색깔 때문에 몹시 지저분했다.
하슬라는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하얀 아란의 얼굴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분명 깨끗하게 세탁되서 다리미질한 제복을 입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난…….
"하슬라."
"가까이 오지 마!"
"왜 그러는거야?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거야?"
하슬라는 차마 아란을 보지 못하고 뒤돌아섰다. 자꾸 그날 하에라가 했던 말이 맴돌았다. 그 옆에 서 있던 아란이 떠올랐다.
아란이 하슬라의 뒤에 바짝 다가와 어깨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하슬라는 뒤를 돌며 아란의 손을 쳐냈다.
"왜 여기에 온 거야? 뭘 확인하려고 왔어? 내 옷이 어떤가 보기라도 하려고?"
하슬라는 아란의 눈을 보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아란이 두려운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저 말들이 왜 지금 여기서 쏟아져 나왔을까. 아란에게 해야 할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아란이 뒷걸음질 쳐 주방을 뛰쳐나갔다.
하슬라는 그 모습을 그저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왜 자꾸 어긋나기만 하는 것일까. 도대체 왜일까.
아란은 그저 하슬라가 너무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정원에서 보냈던 하슬라와의 시간이 자신을 견딜 수 있게 해주었는데. 지난 몇 달간 도대체 하슬라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내가 싫어진 걸까. 차라리 말이라도 해주었으면. 아란은 알 수 없는 배신감에 지쳐 쓰려져 바닥에 놔 뒹굴 때까지 말을 달렸다.
며칠을 한숨만 내쉬며 도서관에 쳐박혀 있던 하슬라가 일과시간이 끝나자, 주방으로 내려가 보았다. 하지만 제나는 하에라의 시중을 들기 위해 2층으로 올라가 있었다. 발걸음을 제 방으로 돌린 하슬라가 문을 여는 대신 정원으로 나가기 위해 성벽 사이를 지났다.
노을이 지고 있는 정원은 여전히 아름다웠고, 아란이 마련해준 공간이 노을빛에 잘 녹아있었지만, 하슬라의 눈에 들어온 건 테이블 위에서 썩어가고 있는 산딸기 타르트였다. 다 무너져 내린 타르트 위에 얹어진 산딸기만이 그것이 자신이 설레며 만들었던 타르트라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아란이 오지 않았다.'
이곳에 왔다면 이 타르트가 하슬라가 만든 것임을 알아보지 못할 수가 없었다. 그날 하에라가 먹던 타르트와 똑같은 것이었으므로.
하슬라는 그제야 자신이 견디지 못했던 이유를 알았다. 아란이 자신의 세상으로 들어오기를 원했을 때 자신과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느끼며 살아갈 줄 알았었다. 하지만 아란은 자신과는 다른 세상의 사람이었다.
알 수 없는 불만들,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모습들. 하지만 자신은 한 번도 아란에게 물어볼 생각도 원하는 것을 말해줄 생각도 없었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테지.
하슬라는 손으로 타르트를 뭉개서 자작나무 숲으로 집어 던졌다. 불쾌한 냄새가 퍼지자, 그녀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 손에 덕지덕지 묻어 있는 타르트 잔해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