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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슬라 29화

by 백서향

도서관에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 같았다. 키가 껑충 커진 하슬라만이 그 세월을 증명해주는 것 같았다. 3년.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던 하슬라는 시간을 보내기 위한 방법으로 독서를 택했다. 딱히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베이킹 레시피가 적힌 책들을 읽어 나가던 하슬라는 그것들을 공책에 베껴 쓰기 시작했다. 가끔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어들어 제나와 레시피대로 디저트를 만들어 보기도 했다. 모든 레시피 책을 베끼고 나자 할 일이 없어진 그녀는 소설을 읽기 시작했고, 인문서를 읽다 잠들었다.


더이상 읽을 책이 없어진 하슬라는 구석에 쌓여있는 오래된 책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책은 입구와 가까운 서가에 꽂혀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도서관의 안쪽까지는 들어가 보지 않았다. 먼지가 가득 쌓여 있는 책을 장갑을 낀 손으로 하나하나 털어내고는 서가에 꽂아 넣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인간의 생활사?'


흥미가 발동한 하슬라는 장갑을 벗어 던지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시들해졌다. 인간의 생활이 신의 땅에서 사는 사람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신이 인간의 땅으로 내려왔을 때 그들은 인간의 생활과 언어를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큰 차이가 하나 있었다. 관자놀이에서 귀 뒤로 이어지는 푸른빛. 하슬라는 손가락으로 귀 뒤를 문질러보았다. 인간은 그게 없었다. 하슬라도 마찬가지였다.


하슬라는 책을 서가에 꽂아 놓고는 창문을 닫기 시작했다. 이제 곧 일과가 끝날 시간이었다. 가면서 주방에 들러 간식을 가져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마지막 창문을 닫던 하슬라가 그대로 멈췄다.


"아, 미안해요. 꼭 봐야 하는 책이 있어서."


역광 때문에 하슬라를 알아보지 못한 아란이 그저 사서인 줄 알고 말을 걸어왔다. 그전에도 아란은 도서관에 자주 들렀고, 성안을 오고 갔었지만 하슬라는 그럴 때마다 용케도 아란을 잘 피해 오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은 마주치고 만 것인가.


하슬라는 창문을 닫던 손을 멈추고 그대로 서 있었다. 아란은 정말 급했던 모양이었는지 곧장 서가 안쪽으로 가서 자신이 원하는 책을 빼서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도서관에 죽치고 앉아서 책을 읽던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모습이었다.


그제야 하슬라는 창문을 마저 닫으며 한숨을 내뱉었다. 그날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갔다면 지금도 아란과 친구로 지내고 있었을까. 괜한 자존심과 객기 때문에 이를 이 지경으로 만든 건 자신이라는 자책감에 하슬라는 한참 동안 그곳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바론은 하슬라가 꾸준히 제나와 만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 했다. 하슬라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조용히 지내고 있었고 제나도 더 이상 선을 넘지 않았다. 오히려 하에라를 더 신경 써주었기 때문에 힐조도 제나를 만족해하고 있었다.


"아가씨, 왜 이렇게 예뻐요?"


하슬라를 가만히 보고 있던 제나가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왜이래? 뭐 원하는 게 있구나!"


"아니요! 자주 봐서 그동안은 몰랐는데……. 아가씨 일어나봐요."


제나의 등살에 떠밀려 일어나긴 했지만, 하슬라는 도대체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키가 커져서 치마가 짧아지고 신발이 작아져 발이 아프긴 했지만 예쁘다니.


제나는 하슬라가 쓰고 있던 두건을 벗기고 손으로 머리를 빗겨주었다. 곱슬머리가 제나의 손에서 찰랑찰랑 부드럽게 빠져나갔다.


"아가씨 거울 안 봐요? 이봐요. 보랏빛도 진해졌고 웨이브 진 머리에 숱도 많아지고 더군다나 머릿결이 이렇게나 부드럽잖아요. 눈에 쌍꺼풀이 생긴 건 아세요? 턱도 갸름해졌고 목도 길어졌잖아요. 세상에 이렇게나 부드러운 팔에 데인 상처라니. 쯧쯧."


제나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몇 번이고 저었다. 외모에 목숨이라도 걸 나이가 아닌가.


"의상실에 말해서 아가씨 옷 몇 벌 만들어 놓으라고 할게요. 무릎이 다 보이려고 하네. 관심 좀 가져봐요."


그제야 하슬라는 창문에 비친 제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거울을 잘 보지도 않았을뿐더러 옷이나 장신구에 관심이 전혀 없었다. 어차피 어두컴컴한 도서관에 쳐박혀 있을 텐데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내가 정말 예뻐?"


"그럼요. 하에라님보다 훨씬 더 예뻐요. 귀티가 흐르는걸요."


"말도 안 돼. 행여나 다른 데서는 그런 말 하지마. 하에라가 가만히 있지 않을걸."


"내가 미쳤어요. 그런 소리를 하게요. 큰일 나지."


제나는 적당히 부풀어 오른 반죽을 무쇠 냄비에 담고는 화덕에 밀어 넣었다. 무화과 조림을 잔뜩 넣은 깜바뉴를 구울 예정이었다. 쿠푸를 넣은 반죽이 냄비 위로 솟아올랐다.


"예전처럼 아가씨랑 나랑 둘이서 이렇게 디저트 만들고 싶네요."


"나도 그래. 그때가 그리워."


도서관과 주방 그리고 제 방만 오가며 생활한 탓에 다른 것에 신경 쓸 일이 없었다. 하에라가 후계자가 된 후로는 아침 식사에 하슬라는 빠지게 되었다. 아주 가끔 넷이서 저녁 식사를 하는 일이 있긴 했지만 정말 드문 일이었다. 바론과 힐조, 하에라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나날이 지속되고 있었다.



하슬라가 도서관에서 돌아왔을 때 옷장에는 새 옷들이 한가득 들어있었다. 옷을 훑어보던 하슬라가 시폰 소재로 만든 하얀색 원피스를 꺼내 들었다. 팔과 치맛단에 주름을 만들어 풍성하게 보이게 했고 군데군데 잔잔한 꽃무늬로 수를 놓았다. 분명 제나가 의상 실장에게 우겨서 만든 옷일 것이라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거울 앞에서 옷을 대보던 하슬라가 입고 있던 옷을 벗고는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긴 목과 그 아래로 이어지는 가슴선까지 자연스럽게 떨어지는 원피스가 하슬라를 더욱 돋보이게 해주었다.


하슬라는 빗을 들어 천천히 머리를 빗어 나갔다. 가슴 부근까지 떨어지는 짙은 보라색 머리가 찰랑였다. 햇빛을 거의 보지 않은 탓인지 얼굴이 창백해 보였다. 하슬라는 언젠가 제나가 주고 간 분홍색 립스틱을 꺼내 들었다. 하에라가 단장을 할 때 보았던 대로 입술에 살짝 문대어보았다. 색깔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얼굴이 한층 밝아 보였다.


하슬라는 다시 신발에 발을 넣은 후 문을 열고 방을 나섰다. 주방에 가서 제나에게 제일 먼저 보여줄 생각이었지만 제나는 2층에 올라간 후였다. 아쉬운 마음에 발길을 돌려 방으로 향하던 하슬라는 문고리에 손을 얹어놓은 채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만 더 걸어가면 정원으로 나갈 수 있는데 왜 갈 수가 없는 걸까. 하슬라는 자신의 옷을 한번 내려다보고 다시 성벽 쪽을 바라보다 문고리에서 손을 뗐다. 이대로 방으로 들어가긴 싫었다.


'그래, 아무도 없을 거야. 당연히 아무도 없겠지.'


안으로 들어가며 주문처럼 되뇌던 하슬라의 눈에 펼쳐진 건 무성히 자라난 잡초들이 덮고 있는 테이블이었다. 의자는 먼발치에 누워 있었고 쿠션은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하슬라는 의자를 테이블 앞에 세우고는 천천히 자작나무 숲으로 들어가 보았다. 가을바람에 마른 잎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길 끝에는 여전히 시내가 흐르고 있었다. 시냇물에 제 잎들을 적시던 버드나무는 부러져 한쪽에 쓰러져 있었다. 여름내 하에라가 내린 비의 양이 너무 많았던 탓이었을까. 하슬라는 옷이 젖는 줄도 모르고 시냇가로 내려가 찬물에 얼굴을 씻었다.


먼 산 너머로 넘어가는 해가 짙은 황금색 노을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하슬라는 바론의 정원에서 낫과 작업복을 가져왔다. 다른 옷으로 갈아입은 하슬라는 한 손으로 잡초를 쥐고 낫으로 그어보았다. 예전과는 다르게 한 번에 잘 잘려 나갔다. 키도 크고 힘도 생긴 하슬라에게 이제 이 정도는 쉬운 일이 되었다. 느티나무 주위에 있는 잡초를 낫으로 베어서 한쪽에 치워놓은 후 호미로 뿌리를 캐내는 일을 해 나갔다. 시간이 날 때마다 편편한 돌들을 모아 그 위에 쌓아 놓은 후에 다시 테이블과 의자의 위치를 잡았다.


성벽 쪽에는 주방에서 가져온 스툴을 여러 개 가져다 놓았다. 혹시 비가 올 때를 대비해 차양도 가져왔다. 멀리서서 보니 그럴싸 했다.


작업복을 툴툴 털어 상자에 넣어놓은 후에 낫과 호미도 정리했다. 그리고 하슬라는 낮잠을 청했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이 엎드린 하슬라의 머리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다음날도, 다다음 날도 하슬라는 정원에서 시간을 보냈다. 도서관 일을 하는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에라 때문에 바빠진 제나도 하슬라를 만날 수 있는 날이 손에 꼽았다.


하슬라는 하루하루 다른 옷으로 바꿔 입고 정원으로 나갔다. 베이지색 미니 원피스에 자수정이 달린 초크도 잘 어울렸고 연보라색 드레스에 양털로 만든 망토도 괜찮아 보였다.


그날은 다시 잔꽃 무늬가 수놓아진 흰색 원피스를 꺼내 입었던 날이었다. 도서관 업무를 쉴 수 있는 날이라 이른 아침부터 정원으로 향했다. 구두 대신 맨발로 정원을 거닐던 하슬라는 낙엽이 진 자작나무 숲사이로 내비치는 햇살에 눈 부셔하며 한참을 서 있었다.


"하…… 슬라?"


바람이 세차게 불고 지나간 탓에 하슬라는 눈을 감으며 몸을 웅크렸다.


이 익숙한 목소리는……… 바람 소리를 착각한 것이었을까. 순간 원피스가 바람에 나부껴 하슬라의 몸을 감쌌다. 그 바람에 그녀는 잠시 비틀거렸지만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며 몸을 곧게 폈다.


"하슬라 맞지?"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아란이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낙엽 밟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그동안 아란은 성벽 앞에 서서 망설이기만 했다. 왠지 들어가면 안 될 것만 같아서. 하지만 오늘은 음악 같은 바람 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이끌려 왔다. 그리고 그곳에 한 여인이 있었다.


아란은 하마터면 하슬라를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그가 기억하는 하슬라가 아니었다. 큰 키에 긴 머리카락 그리고 흰색 원피스는 하슬라를 연상시킬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작고 말랐던 보라색 머리의 아이는 이제 없었다.


아란은 조심히 다가가 하슬라의 어깨에 손가락을 살짝 얹어보았다. 하슬라의 어깨가 잠깐 올라갔다 내려갔지만, 뒤를 돌아보진 않았다.


하슬라는 잠시 망설였다. 어떤 눈으로 아란을 마주해야 하는 걸까.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인사를 해야 할까 아니면 왜 왔냐고 따져 물어야 하는 것일까. 하슬라는 그냥 아란을 마주하기로 마음먹고는 몸을 그에게로 향해 돌렸다.


아란은 순간 아찔해졌다. 눈부시도록 아름답다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만들어진 단어임이 분명했다. 찰랑이는 보라색 머리카락을 뒤로하고 눈물이 맺힌 큰 눈망울이 나타났다. 하얀 피부에 붉게 물든 얇은 입술이 꽃처럼 피어나 있었다. 아란은 입을 벌린 채 한참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하슬라에게 들릴까싶어 아란은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하슬라의 눈이 묻고 있었다. 여기에 왜 온 거냐고.


"잘 지냈어?"


하지만 아란은 대답 대신 며칠 전에 본 사람처럼 물었다.


"응. 너는?"


그리고 하슬라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나도."


그리고 둘은 서로를 보고 웃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하슬라가 바람에 몸을 떨자, 아란이 겉옷을 벗어 하슬라에게 입혀주었다. 아란의 온기로 데워진 옷은 따뜻했다.


"어떻게 지냈어? 아픈 데는 없지?"


아란이 하슬라에게 앉혀 주며 물었다. 햇살이 내리쬐는 자리라 의자가 따뜻하게 데워져 있었다.


"도서관에서 일하고 있어. 폐하께서 일자리를 주셨거든. 좀 웃기지? 내가 도서관이라니."


"나 도서관에 자주 갔었는데 한 번도 너를 보진 못했는데……."


"내가 없을 때 왔었나보지. 너는 어땠어?"


하슬라는 재빠르게 말머리를 돌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성안에서 경호를 한다는 자체가 좀 지루한 일이기는 해. 물론 언제 생길지 모를 사고에 대비해야하는 건 맞지만. 주로 하에라랑 산책하거나 차를 마시거나 경비병들을 관리·감독하는 일을 했어."


"그랬구나."


"오히려 제나가 하에라 옆에서 많이 도와주고 있어."


'제나가 많이 힘들었겠어. 다음에 만나면 맛있는 걸 만들어줘야지.'


해가 머리 위로 올라오면서 볕이 따가워지자, 하슬라는 겉옷을 벗어 아란에게 건냈다.


"여긴 더 멋져진 것 같아. 나무들도 많이 자라고 안 보이던 꽃들도 많이 피어 있고. 무엇보다 네가 근사하게 꾸며놓았잖아."


아란은 주위를 한번 휙 둘러보고는 하슬라와 눈을 맞췄다. 하지만 곧 시선을 돌리며 천천히 입을 뗐다.


"네가 화를 낼지도 모르겠지만…… 나 다시 여기 와도 될까?"


하슬라도 시선을 숲 쪽으로 돌렸다. 머릿속에서는 당연히 된다고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우리가 다시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역시 안 되겠지? 네가 나에게 왜 화가 났는지 잘 모르겠지만, 아니 네가 화가 난 이유를 모르는 내가 싫어진 걸 수도 있겠지만……."


"아니야. 와도 돼. 네가 와주었으면 좋겠어."


하슬라는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자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이제는 마음을 감추고 살고 싶지 않았다. 정원에 다시 오면서 아란을 다시 만나면서 하슬라는 이제 예전처럼 살고 싶지 않아졌다.


"정말이야? 진짜지? 고마워. 하슬라."


아란을 이제 자신을 협박하던 그 어린 소년이 아니었다. 배려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눈치를 많이 보고 있었다. 어쩐지 많이 달라져 보이는 아란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하슬라는 아란이 환하게 웃자, 생각들을 지우며 같이 따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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