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슬라는 도서관에 있는 암막 커튼을 모조리 젖혀 놓고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갑자기 많은 빛이 쏟아져 들어온 도서관은 다른 공간이 되어 버린 듯했다.
"하슬라, 뭐 하고 있어?"
"너 마침 잘 왔다. 커튼을 다 떼어서 바닥에 내려놔 줘. 손이 닿지 않아."
"그 정 쯤이야. 대청소라도 하려고 하는 거야?"
"도서관이 너무 어두컴컴한 것 같아서 좀 더 밝은 분위기로 만들려고."
"하지만 책은 햇빛을 받으면 상할 텐데."
"걱정마. 책에는 빛이 직접 닿지 않아. 빛이 들어오는 이 공간에 소파와 테이블을 놓으면 좋을 거 같아. 작은 나무와 꽃도 가져다 놓을 거야."
"내가 도와줄게."
아란은 커튼을 다 뗀 후 시녀들에게 세탁해 오라 일렀다. 그 모습을 본 하슬라는 아란이 하슬라보다 더 왕궁의 식구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레이스 커텐을 안으로 넣고 세탁한 암막커튼을 밖으로 달아 양 끝으로 보내자 한층 포근해졌다. 바론의 정원에서 가져온 꽃과 나무들을 군데군데 놓아두었다. 하슬라는 손을 양 허리에 받치고 도서관을 쭉 둘러보았다.
"마음에 들어. 아, 그런데 배고프다."
그동안 쌓아 놓았던 무기력, 권태, 우울감까지 한 번에 날려버린 심정이었다. 죽지 않을만큼만 먹고 살던 하슬라는 오랜만에 배가 고프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도서관으로 출근한 하슬라는 책상 위에 놓인 화병을 발견했다. 그 안에는 장미 한 송이가 꽂혀 있었다.
'너의 하루가 아름답기를.'
말하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그 후로도 꽃이 시들어가려고 하면 꽃이 바뀌어 있었다. 이제 하슬라는 도서관에 오는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하슬라는 나란히 앉아 있는 아란이 차고 있는 칼집을 살짝 건드려 보았다. 책에 집중해 있는 아란이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아 하슬라는 다시 한번 칼집에 손을 가져갔다.
"아! 깜짝이야!"
칼집에 닿은 하슬라의 손을 쳐낸 아란은 그녀가 필요 이상으로 놀라며 소리를 지르자 기분이 상했다.
"뭘 그렇게까지 놀래? 남의 칼에 손대면서?"
"궁금해서 그런 건데. 넌 뭐 그렇게까지 성을 내니?"
"남의 칼에 함부로 손대는 거 아니야. 아무리 하슬라 너라고 해도."
"그럼 나한테도 칼을 주면 되잖아. 검술도 가르쳐주고."
하슬라는 일부러 뽀로통하게 대꾸했다. 아란은 예전에 하슬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 예전에도 검술을 가르쳐 달라고 했던 거 기억나?"
하슬라가 고개를 틀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아란이 일어나서 성큼성큼 자작나무 숲으로 들어갔다.
"자, 이거 먼저 잡아봐."
잠시 후 아란이 가져온 것은 팔뚝만 한 길이의 나뭇가지였다.
"칼을 먼저 쥐게 할 수는 없어. 다칠 테니까. 이걸로 먼저 연습한 후에 내가 멋진 칼을 구해다 줄께. 어때?"
"좋아."
하슬라는 웃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리고. 그렇지. 두 손으로 나무 아랫부분을 잡고. 아니, 너무 힘을 주면 안 돼. 그렇지. 한발을 앞으로 내밀어 지탱하고 두 손을 위로 올려서 아래로 내리그어봐."
"이렇게? 나 잘해?"
아란은 차마 하슬라를 보지 못하고 마른세수를 하고 말았다. 한번 가르치면 열을 배우는 하에라와 자매가 맞나 싶을 정도였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다.
"자 하슬라. 나를 따라 해봐."
아란은 자신의 장검을 꺼내어 시범을 보였다. 제복이 아닌 평상복이었지만 검을 들고 있는 아란의 모습은 여전히 멋있었다. 하지만 하슬라는 발 하나도 앞으로 제대로 내딛지 못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아란이 하슬라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다리 사이 간격을 조정해 주고 두 팔을 어깨높이로 올리게 한 다음 손을 잡아 손안에 나뭇가지를 넣어 주었다. 거칠어진 아란의 손바닥이 부드러운 하슬라의 손등에 닿았다. 하슬라의 심장이 제멋대로 뛰려고 하고 있었다. 한숨을 크게 들이신 그녀는 차마 내뱉지 못하고 숨을 목 안쪽에 모아둔 채 가만히 있었다. 아란이 하슬라의 두 손을 감싼 채 위로 올렸다 아래로 내려주었다. 모아두었던 숨을 토해 낸 하슬라가 나뭇가지를 놓치는 바람에 아란의 팔에 맞고 말았다. 나뭇가지를 다시 주워 드는 아란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다시…… 흠흠. 해보자."
목이 메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한 채로 아란은 하슬라의 손안에 나뭇가지를 쥐어 주었다. 제 거친 손이 하슬라의 부드러운 손에 생채기라도 낼까 아까보다 더 조심히 손을 감쌌다. 손을 위로 올려주어야 했지만, 아란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대로 하슬라의 손을 잡고 서 있었다. 하슬라를 다시 만났던 그날처럼 아찔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한참을 그렇게 서 있기만 했다.
두 사람 모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저…… 나 손이……."
"아, 미안해."
결국 하슬라의 손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저려와 두 사람은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그만할까?"
"어? 그래. 그게 좋겠어."
서둘러 겉옷을 챙긴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인사하는 시늉만 하고는 정원을 빠져나갔다.
제 방으로 들어와 문을 걸어 잠근 하슬라는 손을 심장 위에 얹어보았다. 아직도 쿵쿵대며 빠르게 뛰고 있었다. 방금 그건 뭐였지? 숱하게 스쳤던 아란의 손이었다. 다시 잡는다고 해도 새삼스러울 게 없을.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분명 하슬라의 속에서 무언가가 꿈틀대고 있는 게 느껴졌다. 더군다나 그게 그녀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었다. 아란도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던 것일까?
아란은 겉옷을 입지도 못한 채 말에 급하게 올라탔다. 하지만 막상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이 기분으로 집으로 가서 아버지의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하슬라의 손을 잡았던 손이 아직도 떨리고 있었다. 아란은 집으로 가는 대신 들꽃이 무수히 피어있는 들판으로 향했다. 들뜬 마음으로 아란은 제 눈에 예뻐 보이는 꽃을 한 아름 꺾어서 다듬기 시작했다. 가슴이 부풀어 올라 터질 것만 같았다. 누구에게라도 이 마음을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였다. 숨을 크게 쉬고 몰아내면서 겨우 진정한 아란은 근사한 꽃다발을 만들어 냈다. 내일 도서관 화병에 꽂힐 꽃이었다.
꽃을 옷 속에 잘 감춘 후 조용히 집 안으로 들어가던 아란은 아버지의 부름에 그대로 서재로 향했다.
"부르셨어요?"
"뭐 하다 이제 오느냐? 오늘, 이 아비와 말을 고르러 가기로 한 거 있었니?"
"죄송합니다. 제가 깜빡했어요."
"그게 뭐냐? 뭐? 꽃?"
아란이 당황한 나머지 옷 속에 있던 꽃다발을 놓치고 말았다.
"계집애처럼 꽃이나 가지고 놀다 오다니. 넌 언제쯤 철이 들려는 게야? 무사면 무사답게 행동해야지! 쯧쯧쯧. 됐다. 말은 나 혼자 보러 다녀오겠다."
무들은 일부러 아란의 어깨를 세게 부딪치며 지나갔다. 그리고 떨어진 꽃다발이 그의 발에 짓이겨졌다.
아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꽃이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아버지는 아란을 다시 한번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그는 찌그러진 꽃다발을 들고는 몇번 을 바닥에 내리쳤다. 그것이 마치 무들이라도 되는 양. 그리고 엎으려 한참을 그곳에서 울부짖었다.
아란은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을 새벽에 조용히 일어나 성으로 향했다. 비록 어제의 그 꽃다발만큼은 아니었지만, 가는 길에서 본 가장 예쁜 꽃을 꺾어다 도서관 화병에 꽂아 놓았다. 집에 있기 싫어 일찍 나온 길이었지만 딱히 가 있을 곳도 없었다. 아란의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정원으로 향했다.
낮게 깔린 안개가 자작나무가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 주었다. 그 사이를 지나 시내에 다다른 그는 젖어있는 낙엽 위에 풀썩 주저앉았다.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를 견디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 자신을 위로 하는 것도 그만 둔지 오래였다. 아버지는 작은 일에도 화부터 내셨다. 그게 자신이 정한 기준을 넘는 순간 폭력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라는 이유로 힘으로 막아설 수가 없었다. 아니, 무들이라는 무사를 꺾을 용기가 아란에게는 없었다. 그래서 그냥 견뎠다.
흐르는 시내를 멍하니 바라보던 아란은 희미하게나마 미소를 지었다. 이곳에 오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곳에 오지 못했던 시간을 보상받듯 아란은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