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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슬라 31화

by 백서향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내리는 족족 쌓이는 눈 때문에 망설이던 하슬라는 망토를 뒤집어쓴 채 정원으로 나가보았다. 생각보다 차갑지도 춥지도 않았다. 하슬라는 몸을 낮춰 눈을 뭉쳐서는 들판으로 던져보았다. 눈송이가 굴러가면서 점점 커졌다.

'눈사람을 만들어야겠다.'


하슬라는 눈덩이를 굴리고 굴려서 제 허리까지 오게 만들었다. 그리고 다시 작은 눈덩이를 굴려서 그 위에 얹어놓았다. 눈코입이 없었지만, 꽤 그럴싸한 눈사람이었다. 눈이 쉽게 그칠 것 같지 않았지만, 그녀는 이대로 방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 번 온전히 이곳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날이었다.


손에 감각이 없어지고 있었다. 빨갛게 얼어붙은 손에는 녹았다가 얼어붙은 잔해들이 붙어있었다. 두 손을 마주 잡고 비벼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장갑을 가지고 올걸.


"춥지?"


다정한 목소리와 큰 담요가 하슬라의 몸에 둘렸다. 어느새 다가온 아란이 크고 따뜻한 손으로 하슬라의 두손을 감싸쥐었다.


"얼음장이잖아. 이렇게 되도록 여기 있었던 거야? 아프면 어쩌려고."


"나 괜찮아."


하슬라는 정말 괜찮았다. 아란의 따뜻한 손길이면 충분했다.


"따뜻한 차도 가져왔어. 우리 차양 아래에서 마시자. 다음에는 내가 화로도 가져다 놓을게. 그러면 겨울에도 여기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야."


아란은 차를 하슬라에게 따라주면서 찬바람이 들어가지 않게 담요를 여며주었다. 미세하게 떨리던 하슬라의 몸이 점점 안정을 되찾았다.


"바보야. 이렇게 추운 날 맨손으로 눈사람을 만드는 사람이 어디 있니?"


"재밌잖아. 난 눈 오는 날이 좋더라. 그런데 이거 하에라가 내리는 눈인가?"


"아닐 거야. 하에라가 성위에 있는 제단에서 의식을 거행하게 되면 내가 모를리가 없거든. 내가 경호 대장이잖아."


"나도 눈이나 비를 내릴 수 있었으면 어땠을까?"


"아…… 넌 그런 능력이 없는 거야?"


"응. 난 구름을 모을 수가 없어. 여러 번 시도해 봤는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더라."


의기소침해져 있던 하슬라를 아란이 시무룩하게 바라보자, 하슬라는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내며 아란을 바라보았다.


"대신에 불빛을 만들어 낼 수 있잖아."


하슬라는 담요를 벗고는 손으로 원을 만들었다. 원 중심에서 빛이 새어 나오더니 곧 보라빛 불빛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손을 위아래로 흔들며 불빛들을 멀리멀리 날려 보내던 하슬라가 그 빛들을 따라갔다. 아란도 황홀한 눈으로 그 빛과 하슬라의 뒤를 쫓았다. 보랏빛들은 어느새 정원을 가득 메웠다. 밤하늘에 박혀있던 별들이 땅으로 모두 내려온 것 같았다. 마치 꿈속에서 하늘을 걷고 있는 기분이었다.


어릴 적에 하슬라가 보여주었던 불빛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꼭 바람이 불고 있는 것 같았다. 보랏빛이 두 사람을 감싸며 이리저리 나부꼈다. 아란은 하슬라의 작은 손을 제 손안에 넣어 감쌌다. 하에라처럼 능력이 없으면 어떠랴 싶었다. 지금 옆에 있는 소중한 이도, 제 마음을 들뜬 감정으로 충만하게 가득 메우는 이도 하슬라였다.



"그 아이를 어떻게 하실 건가요? 이제 스무 살이 되지 않습니까? 슬슬 성 밖으로 내보내야 할 시기인 것 같습니다."


힐조는 바론과 응접실에서 차를 마시며 조용히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의 어투도 어조도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후계자가 아닌 자식은 스무 살이 되면 결혼을 시켜 성 밖으로 내보내는 게 관례지 않습니까? 결혼 상대로 생각해 놓으신 사람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라면 제가 알아볼까요?"


바론은 힐조의 말대로 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고 싶은 마음이었다. 성안에서만 살았던 아이를 성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는 것도 걱정인데, 생판 모르는 이와 결혼이라니.


"하지만 하에라의 결혼이 먼지이지 않을까 합니다. 하에라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는 가문과의 결혼을 먼저 추진하는 것이 어떨까요?"


"그건 폐하와 제 생각이 같지 않습니까? 지금은 먼저 하슬라의 결혼 문제를 매듭지었으면 합니다."


바론은 후회했다. 그때 제나가 하슬라를 데리고 나가서 산다고 했을 때 허락할 것을. 힐조가 이렇게 빨리 결혼 문제를 꺼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폐하, 그 문제는 저에게 맡겨주기로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제 와서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힐조는 9년 전 하슬라를 성안으로 데리고 들어온 날을 떠올렸다. 위기를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한 그녀는 조금도 흥분하지 않고 화를 내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금, 바론은 망설이고 있었다.


"조금 더 시간을 주면 어떻겠습니까? 그 아이가 성안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아니고 하에라와 충돌이 있는 것도 아닌 데 자연스럽게 내보냈으면 해요."


"안 됩니다!"


힐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갑자기 아버지 노릇이라도 하려 하는 것인가. 힐조의 입가에 냉소를 머금은 웃음이 번졌다. 평소라면 절대 바론 앞에서 그런 식으로 얘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저의 자식이 아니라 폐하의 사생아입니다. 그것도 인간의 왕이 비를 내리게 하려고 만든 아이란 말입니다. 그건 저에 대한 배신이지 않았습니다. 전 그런데도 참고 또 참았습니다. 그런 아이를 9년씩이나 품어주었으면 저의 할 일은 다 한 것 같습니다. 저의 인내심을 시험하지 말아 주세요. 폐하."


힐조는 9년 전에 하고 싶었던 말을 이제서야 뱉어냈다. 바론도 알고 있었다. 힐조가 참고 받아들여 줬다는 것을.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그녀가 하자고 하는 대로 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다만 아버지로서 걱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바론은 하슬라의 아버지이기 이전에 하에라의 아버지이자 이 나라의 왕이었다.


"그렇게 하리다. 하슬라의 결혼은 전적으로 부인에게 맡기겠어요. 알아서 잘 해주리라 믿어요."


결국 바론은 이번에도 힐조의 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둘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차를 마시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힐조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바론이 얼마나 분란을 싫어하고 자신의 명성에 흠집 나는 것을 싫어하는 왕인지를. 그런 그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하지만 힐조가 모른 것이 하나 있었다. 그 둘의 이야기를 밖에서 하에라가 듣고 있었다는 것을.


하에라는 그저 두 분이 차를 마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응접실로 가는 중이었다. 제나에게 굽게 한 아몬드 쿠키를 제시간에 가져다드리고 싶었다. 기쁜 마음으로 문을 열려고 한 순간 하에라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하슬라가, 하슬라가 아버지의 사생아라고? 그것도 비를 내리게 만들려고 인간의 왕이 일부러 그렇게 했다고?'


쿠키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버렸지만, 하에라는 그것을 주워 들 수가 없었다. 그저 문고리를 붙들고 간신히 서 있을 뿐이었다. 하에라는 그동안 하슬라가 어디에서 온 건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단지 자매가 생겨서 기쁘다고만 생각했을 뿐이었다. 왜 그랬을까. 왜 단 한 번도 그것을 궁금해하지 않았을까. 하슬라가 아버지의 딸이고 자신과 어머니가 다르다는 것을 왜 이제서야 깨닫게 된 것일까.


하에라는 크게 숨을 들이마신 후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이성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지금 이 문을 열고 들어가봤자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부모님의 갈등만 부추길 뿐이었다.


'침착하게 생각하자.'


하에라는 일단 이 일을 묻어두기로 했다. 힐조가 그랬듯이 하에라는 언젠가는 쓸모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앞으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단지 하에라에게 작은 무기가 하나 생겼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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