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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슬라 33화

by 백서향

하에라는 조금씩 의식을 되찾는 중이었다. 그래서 오가는 말들이 꿈일 줄로만 알았다. 아란의 말이 하슬라에게 닿았다. 하에라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따스한 온기였다. 하에라가 모르는 사이에 둘의 관계가 달라져 있었다. 친구여도 안 될 사이에 둘의 대화는 그 이상을 의미하고 있었다. 하에라는 식은땀이 계속 흐르는 와중에도 차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아란이 제 호위를 맡게 되었을 때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아란은 하에라의 것이어야 했다. 감히 사생아 따위가 넘볼 수 있는 이가 아니었다. 하에라는 눈을 떠서 둘의 모습을 마주하면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두 주먹을 꽉 쥔 채 참고 또 참았다.

두 손이 떨려오고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하슬라는 그런 하에라의 몸에 이상이 생긴 줄로만 알고 다시 수건을 바꿔주고는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하에라의 눈에 눈물이 고였지만 그녀는 그것을 제멋대로 흐르게 놔둘 생각이 없었다. 하슬라를 마주한 눈은 상처받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흐트러졌던 물건들을 모두 제자리로 돌려놓겠다는 분노에 찬 눈이었다.



"그건 안 될 말입니다."


무들이 바론을 똑바로 쳐다본 채 큰소리를 내었다. 바론이 이제 막 아란을 하에라와 결혼시키고 싶다는 말을 끝낸 참이었다.


"자네는 내가 왜 아란에게 호위를 맡겼다고 생각했나?"


"그야 친구 같은 사이여서가 아니었겠습니까? 폐하."


"그거야 내가 왕이니 하니 소리일테고, 이제 좀 솔직해져 보세."


바론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무들의 어깨를 살며시 눌렀다. 무들은 그 손길이 섬뜩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한 그 몸짓이 무들의 입을 꽉 다물게 만들었다.


"내가 아란을 눈여겨보고 있다는 것을 자네도 알고 있었을 테지. 배우자 공은 아버지로서도 무관으로서도 욕심이 나는 자리이지 않은가? 무들 자네도 충분히 그랬으리라 보는데 어떤가?"


"욕심이 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일도 아니고 아가씨의 결혼이니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네가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우리는 형제 같은 사이이지 않나? 실제로 형제가 될 뻔하기도 했잖……."


바론의 목이 메였다. 여동생 히제가 생각나서였다. 무들을 제 목숨보다 사랑한 그녀는 결국 목숨을 버리고 말았다. 만약 선왕께서 둘의 결혼을 허락하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히제는 아름답고 고품스러운 얼굴로 무들 옆에서 행복했을까?


"우리 대에서 이루어지지 못했던 일을 자식대에서라도 이루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 물론 아란의 훌륭한 인품과 재주를 높이 사기도 했네. 하에라의 짝으로 그보다 더한 아이는 없을 것이야. 다정한 성품으로 하에라를 잘 보살펴줄 수 있을 것이라 힐조와도 이야기를 끝내 놓았어. 그러니 이제 예의상 거절하는 시간 낭비는 하지 말게나. 이제 곧 스무 살이 되는 하에라가 더 행복해졌으면 하는 바람뿐이네. 물론 아란도 그렇고."


"알겠습니다. 폐하. 뜻 받들겠습니다."


바론은 무들의 어깨를 다시 한번 잡았다. 이번에는 손아귀에 힘을 잔뜩 실어서였다.


"난 하에라가 행복하기만을 바라네."


무들은 저 말이 의미하는 바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란을 배우자 공으로 선택한 것인지도 몰랐다. 하에라를 잘 내조하면서 권력에 욕심이 없어야 하는 사람. 누가 봐도 아란이 적임자였다. 무들은 아란의 그런 점이 항상 못마땅했지만, 이번에는 유리하게 작용했기에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란이 배우자 공으로 정해졌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하에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하슬라와 아란이 가까운 사이라고는 하나 마지막에 웃는 자가 승자였다. 하에라는 일이 이렇게 될 줄 짐작하고 그 둘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숨긴 것을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 둘 사이를 공론화해 보았자 하에라의 얼굴에 먹칠하는 일일 것이었다. 한낱 풋사랑도 결혼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을 것이다. 하에라는 아란이 결혼 소식을 들으면 하슬라 따위는 얼마든지 잊을 수 있을 것이라 자신했다.



하지만 아란은 무들에게 소식을 전해 듣고는 안간힘을 다해 버티는 중이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면서 아득해지고 있었다.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이 아버지인 무들이 아니었다면 그 사람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을 것이다.


"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누구랑 결혼한단 말씀이세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아란이 무들 가까이 다가가려 했지만. 온 몸이 떨려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란의 어머니인 아리슬은 둘 사이의 긴장감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아버지의 말을 듣지 못하였느냐? 하에라 아가씨와 돌아오는 봄에 결혼식을 올릴 것이라고 얘기하지 않았니?"


아란은 손을 벌벌 떨면서도 무들에게 한 발짝 씩 다가가기 시작했다.


"다시 말씀해 주세요. 아버지. 제가 누구랑 결혼한단 말입니까?"


그동안 보고만 있던 아리슬이 아란의 팔을 잡아끌었다. 더 이상 다가서면 무들이 무슨 짓을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다 큰 아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무들이 무서운 아리슬은 아들을 달래는 것으로 그것을 막아보려 했다.


"다시 말씀해 주시란 말입니다!"


아란은 기어코 무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가슴 속에 쌓인 응어리가 한순간 폭발하듯 튀어나왔다. 동시에 무들의 팔도 아란에게 향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팔이 아란을 때리지 못했다. 대신 아리슬이 맞아 나가떨어졌다.


"어머니!"


놀란 아란이 아리슬에게 다가갔다.


"난 괜찮아. 아란, 아버지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으면 해. 부탁이다."


유약하기만 한 어머니였다. 아버지에게 맞을 때면 발만 동동 구르며 울기만 하던 어머니였다.지금도 아란이 걱정되기 보다는 분란이 일어나는 것이 싫어서 저런 말을 하는 것일 테지. 아란은 방관자인 어머니에게 애틋함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불쌍한 어머니였지만 다른 식으로 저를 괴롭히는 분이었다.


"네가 감히 아버지에게 소리를 질러? 그 자리에 어떤 자리인지 몰라서 그러는 것이냐?"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 중요한 자리를 결정하는 데 왜 제 의견은 없는 것입니까?"


"뭐? 네 의견?"


"저는 싫습니다. 하에라와의 결혼도, 배우자 공의 자리도 모두 싫어요."


"뭐?"


무들의 아래턱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는 그대로 아란을 발로 차서 넘어뜨렸다.


"감히 네가 아비에게 대들어?"


무들이 다시 한번 발을 들었지만, 이번에는 아란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 발을 잡아 무들을 넘어뜨린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더 무서운 매질이 시작되었다. 급기야 이성을 잃은 무들이 칼을 빼어 들었다. 아란은 올 것이 왔구나 싶어 놀라지 않았다. 눈을 감고 담담히 제 목에 들어온 칼을 받아들였다.


"한 번만 더 나에게 대항했다가는 아들이어도 봐주지 않을 것이다. 이 칼이 어디로 갈지는 나도 모른다."


감은 아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결국 또 아버지의 폭력 앞에 무력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만약 제 손에도 칼이 쥐어져 있으면 아버지에게 들이댈 수 있었을까? 아란은 답을 알고 있었다. 자신은 절대 그러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리고 이 결혼의 끝이 어디일지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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