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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슬라 34화

by 백서향

"하슬라, 우리 도망갈까?"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야?


부드러운 담요에 누워 아란의 팔베개를 하고 누워있던 하슬라가 벌떡 일어났다. 따사로운 햇빛에 눈이 부신 하슬라는 손으로 차양을 만들며 아란을 바라보았다.


"너도 여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서. 다른 곳으로 가서 우리 둘이 살면 행복하지 않을까?"


"무슨…… 일 있어? 그런 거야?"


아란은 말할 수가 없었다. 차마 하에라와 결혼 때문에 그렇다고 말하지 못했다. 하슬라는 가장 나중에 알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을 통해 알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란은 가슴 한가운데가 구겨지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아니야. 괜히 한번 투정 부려 본 거야."


"누구한테 싫은 소리 들었어? 나처럼?"


몸을 하슬라 쪽으로 튼 아란은 쓸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태어나서 가장 행복한 나날이었다. 정원이 주는 아늑함과 평온함은 하슬라가 없이는 이루지 못할 감정이었다.


"내가 누구처럼 일을 엉터리로 하는 사람은 아니지."


아란은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걱정되어 일그러진 하슬라의 얼굴에 웃음기가 돌았다.


"너 정말?"


아란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시내쪽으로 걸어갔다. 신발을 벗어 놓고 양말을 그 안에 넣고는 바지를 돌돌 말아 올렸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두 발을 시내에 담가보았다. 칼로 긋는듯한 통증이 스쳐 갔다. 그날 아버지의 칼은 그의 목에 피를 내지는 못했지만, 그 칼을 잡은 손에 상처를 남겼다. 아란은 두 손을 펴고 그 상처를 가만히 들여다보다 시냇물에 씻었다. 그렇게하면 상처가 지워지기라도 한다는듯이. 씻고 또 씻었다.


하슬라는 그런 아란이 걱정스러워 가까이 다가서지도 못하고 있었다. 항상 깊은 상처는 자신만 받는 것인 줄만 알았다.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자라 제 몫을 완벽히 해내는 아란같은 사람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일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지금 아란은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 감정을 밖으로 내보내지 못해 꾹꾹 눌러 담다 제풀에 지쳐 힘들어하는 중이었다. 하슬라는 그를 감히 위로해 주고 싶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지금 아란은 터져서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그냥 그의 손을 시냇물 안에서 잡았다. 차가운 물살이 둘의 손을 훑고 지나갔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둘의 온기가 서로에게 전해져 차가운 물 같은 건 상관없을 때까지 둘은 그렇게 손을 잡고 가만히 시냇물 소리를 듣고 있었다.



아란과의 결혼이 확정되었지만, 하에라는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아란도 알고 있는 것이 뻔했지만 그는 그전과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사무적으로만 하에라는 대하는 태도가 오히려 전보다 심해졌다. 하에라의 부드러운 말과 행동과는 달리 아란에게서는 찬바람이 쌩하니 불 뿐이었다.


'이게 다 하슬라 때문이야.'


하에라는 이 모든 게 하슬라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슬라만 없었으면 이렇게 마음 아파할 일도 자존심 상해할 일도 없었을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둘을 떨어뜨려 놓기로 했다. 하슬라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면서도 아란이 하슬라에게서 도망칠 수밖에 없게 하고 싶었다.


하에라는 한 땀 한 땀 자수를 놓고 있었다. 그에게 아란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옷을 선물할 예정이었다.


"휴."


자수를 놓다 말고 자꾸 한숨을 쉬는 하에라를 시녀들은 힐끔힐끔 쳐다보고만 있었다.


"휴."


"무슨 고민거리라도 있으신 거에요?"


"아니야. 휴."


"그러지 말고, 말씀해 보세요. 털어놓으면 훨씬 기분이 나아지실 거예요."


평소 하에라라면 차갑게 신경쓰지 말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정말 그럴까? 털어놓고 나면 좀 나아질까?"


"그럼요."


시녀들도 조용히 자수만 놓고 있는 게 무료하던 참이었다.


"그게 말이야. 어쩌면 좋지? 이런 일을 알고 있는 게 죄지은 것 같고 힘들어."


시녀들은 더 이상 채근하지 않았다. 하에라의 입이 무언가 말하려는지 달싹이고 있었다.


"글쎄 하슬라가. 인간 세상에서 태어난 아이라고 해. 인간들 사이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들이 하슬라를 얼마나 괴롭혔을까? 난 생각만 해도 마음이 아파 와."


"네?"


시녀들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슬라가 왕후의 아이가 아닌 것은 알았지만 인간의 아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너무나 큰 비밀을 알아버린 나머지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하슬라에 대해 떠들고 다녔다가는 큰 벌을 내릴 것이라는 왕후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하지만 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갔고, 눈덩이처럼 부풀어 올랐다. 하에라는 단지 인간의 아이라는 말을 했을 뿐인데 하슬라가 인간의 왕인 비슬의 자식이라는 말까지 떠돌았다.


시녀들은 하슬라가 지나갈 때마다 뒤에서 수군거렸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하슬라도 계속되는 수군거림에 결국 그 내용을 알게 되었다. 제나도 마찬가지였다. 걱정이 되던 그녀를 종일 하슬라를 찾아다녔다.


"아가씨, 여기 있었네요."


불안안 마음과는 달리 제나는 하슬라는 보자 평소와 다름없이 웃으며 다가갔다.


"도서관 일이 아직 끝나지 않은거예요? 난 벌써 도망쳐 버렸을 줄 알았는데."


"나도 그러고 싶은데 여기서 나가기가 무서워서. 제나도 알고 있는 거지?"


제나는 책상 위에 엎드려 있는 하슬라 옆으로 다가갔다. 큰 눈망울에서는 금방이라고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게 뭐 어때서 그래요? 인간 세상에서 태어났든 성안에서 태어났든 아가씨가 폐하의 따님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아니잖아. 내가 그냥 폐하의 딸은 아닌 거잖아. 제나도 알고 있잖아."


제나는 10년전 하슬라를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겁에 잔뜩 질려 있던 그 아이가 오늘 여기에도 있었다. 제나는 하슬라의 보랏빛 머리카락을 살며시 쓸어올려 주었다. 더 받을 상처가 남았단 말인가. 어린아이에게 주어진 고달픔은 진작에 끝내어야 하는 게 아니었나.


"아가씨 그러지 말고 나랑 가서 빵 만들어요. 이럴 때일수록 몸이 움직여야 덜 괴로워요. 바쁘게 움직이다보면 생각들을 떨쳐낼 수 있을 거예요. 어서요."


제나는 하슬라의 겨드랑이 아래로 팔을 집어넣어 그녀를 일으켰다. 하슬라도 못 이기는 척 몸을 일으켰다.


아란과 정원에 있느라 한동안 가지 않았던 주방은 언제나처럼 그녀를 맞아주었다.


"자, 오늘은 무얼 만들어 볼까요? 그러고 보니 아가씨가 좋아하는 음식은 만들어 본 적이 없는 것 같네. 나 지금 되게 미안한 거 알아요? 아가씨가 무얼 좋아하는지 몰라요. 나는."


"쳇, 너무하는걸. 나는…… 나는……."


하지만 하슬라도 말할 수가 없었다. 단 한 번도 무슨 빵을 좋아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괜찮아요. 지금 생각해 보면 되죠. 어때요?"


"난 블루베리 크럼블 케이크를 만들고 싶어."


"좋아요. 그럼, 일단 버터를 녹여볼까요?"


하슬라는 오랜만에 활짝 웃을 수 있었다. 그녀에게는 아란과의 시간이 소중한 만큼 제나와의 시간도 소중했다. 다만 아주 잠시동안 그것을 잊고 지냈을 뿐이었다.


제나는 하슬라가 상처받는 일은 여기까지였으면 했다. 소문은 언젠가는 가라앉을 것이다. 제발 하슬라가 인간들의 욕심 때문에 비를 내리게 하려고 태어난 아이라는 것만은 알지 못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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