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은 돌고 돌아 아란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아란은 '인간의 아이'라는 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 혼란스러웠다. 그토록 고고한 왕인 바론이 왕후가 아닌 인간 여자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라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의 아이를 데려다 키웠다는 것일까?
아란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당장 하에라와의 결혼을 막을 방법도 없는데 이런 소문까지 듣게 되다니. 모든 상황이 하슬라를 포기하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 결국 그렇게 되고 말 것인가? 아란은 아버지를 거스를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날 자신도 없었다. 자신이 하에라에게 간다면 모든 것은 평안해지리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하에라는 어떨까? 하지만 아란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의식이 있던 날 별장에서 보였던 태도는 하슬라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란은 하슬라가 미친 듯이 보고 싶었다. 정원에 너무도 가고 싶었다.
그곳에 하슬라가 있을 것에 대해 의심해 보지 않았다. 계단을 하나하나 내려가면서 아란은 하슬라의 보랏빛 머리카락이 나부끼는 것을 보았다.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에 그는 넋을 놓고 쳐다보았다.
붉다 못해 보랏빛으로 변한 노을을 바라보던 하슬라는 아란의 발걸음 소리를 들었지만,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아란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두려웠다. 인간의 아이냐고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몰랐다.
"괜찮아?"
아란은 그저 조용히 다가와 하슬라의 어깨를 감싸서 제 어깨에 기대게 할 뿐이었다. 그 무엇도 묻지 않았고 채근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하슬라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란에게만은 사실대로 얘기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란이 나중에라도 진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하슬라는 아란의 따스한 눈빛이 한순간에 차갑게 변할지 그게 가장 무서웠다. 그녀의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어주었던 이 정원도 이제는 아란없이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란."
"응?"
"넌 내가 아무렇지도 않아?"
"소문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게 무엇을 의미하든 지금 이순간 나에게는 중요하지 않아. 그러니 오늘만큼은 편하게 기대어 쉬어. 그랬으면 좋겠어."
하슬라를 안심시키게 하기 위한 말이었지만 아란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하슬라는 아란의 말에 꺼내려던 말을 넣어두었다. 이렇게 따뜻함을 지닌 사람이라면 진실이 무엇이든 품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일주일 후에 결혼 발표를 하기로 했다. 그날 너도 하에라 아가씨와 함께 할 것이다."
무들은 이번에도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그에게는 아들의 의사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애초에 다른 사람의 의견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싫다고 말씀드렸어요. 왜 제 말을 안 들어주시는 거예요?"
"이건 명령이야."
"제발 제 말도 좀 들어주세요. 언제까지 아버지 뜻대로 살 수는 없습니다."
힘이 들어가던 무들의 주먹이 스르르 풀어졌다. 아란은 오늘만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래 한번 말해보거라."
무들은 오늘만큼은 칼을 들고 싶지 않았다. 명령에 따르지 않아 칼을 들게 하는 아들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아란은 망설이고 망설였다. 제 마음을 아버지에게 털어놓으면 혹시 그 화가 하슬라에게 미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일주일, 아란에게는 물러날 시간이 없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요."
"하에라가 아니고?"
"네."
"그럼 누군란 말이냐? 성과 집만 오가던 네가 누굴 만난단 말이야?"
무들은 혹시 시녀들 중 한 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슬라에요."
무들이 기가 막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차라리 시녀들 중 한 명이라면 어린 치기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이도 아니고 하슬라라니.
"마음에 품어서는 안 될 사람을 품었구나. 못 들은 걸로 하겠다."
"왜인지 얘기를 해주세요. 왜 안된다는 말씀이세요?"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아란은 무들의 팔을 잡아끌어 그를 돌려세웠다. 무들의 눈빛이 평소와는 달랐다. 아란은 당황하여 아버지의 팔을 놓고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 아이는 인간의 아이야."
"저도 알아요. 인간의 아이이면 왜 안 되는 건가요? 우리랑 다르지 않아요. 하슬라는 착하고 따뜻한 아이예요. 상처가 있다고 마음에 품어서는 안 되는 건 아니잖아요."
"그런 게 아니란다. 아란."
무들은 아들의 어깨를 살며시 감싸 쥐었다. 아란은 흠칫 놀랐지만, 아버지의 몸짓이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힘을 풀었다.
"그 아이는 순수 혈통이 아니란다. 그런 아이가 네 옆에 있게 할 수는 없다."
"아버지! 다른 사람을 마음에 품은 채 하에라와 결혼할 수는 없어요. 그러면 하에라와의 결혼이라도 막아주세요."
아들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무들의 눈빛이 순간 돌변했다.
"넌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라서 그러는 것이냐? 어떻게 그 자리를 포기할 수가 있어?"
"아버지! 제발 제 뜻대로 살게 해주세요. 제발."
아란은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드려 오열했다. 무들의 칼이 목에 들어왔을 때보다 더한 고통이었다. 힘으로면 제압하려는 아버지보다 제 말을 들어주지 않는 아버지가 더 힘들었다.
"아란, 그 아이는 보통의 인간이 아니란다."
무들은 칼을 뽑는 대신 힘없는 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다른 명령이라면 힘으로 누르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사람에 대한 마음은 칼로도 끊어내기 힘들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무들이었다. 무들은 그 옛날 히제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다시 한번 그 웃는 얼굴을 마주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이든 하리라 생각한 적도 있었다. 아란이 그런 고통을 겪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무들도 아버지였다.
"그 아이는 비슬이 비를 내리게 하려고 만든 아이야. 더 이상 폐하에게 고개를 숙이고 싶지 않았던 비슬은 바론의 핏줄이면 비를 내릴 수 있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래서 폐하를 꾀어낸 것 같아. 하지만 그 아이가 비를 내리지 못하자 성 앞에 있는 제단 버려두고 갔어. 그래서 신의 땅에 덩굴이 자라나게 된 거란다. 인간에 대한 노여움 때문에."
아란은 분노한 얼굴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그가 제 마음을 단념시키기 위해 교활한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자식에게 이런 모진 이야기를 꾸며낼 수 있을까.
무들은 입을 꾹 다문 채 시선을 피하지 않고 아란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순간, 아란은 그것이 거짓이 아님을 알았다. 눈가에 드리워진 그늘과 메마른 입술은 아들에게 아픔을 전해야 하는 아버지로서의 안쓰러움이었다. 아란이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그의 모습이었다.
아란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놀란 무들이 그의 몸에 손을 대려 하자 아란은 그 손을 쳐내었다.
"제 몸에 손대지 마세요. 아버지."
아란의 목소리가 분노로 떨리고 몸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하슬라가 왕의 사생아라는 사실보다 그것을 알려준 아버지가 더 원망스러웠다. 자신을 단념시키기 위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아버지가 죽도록 미웠다. 차라리 하슬라를 잊고 하에라와 결혼한다고 말할 것을. 그랬으면 이 사실을 알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감당하기 힘든 사실을 알게 된 아란은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한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
아란은 그대로 말을 달려 성안으로 들어갔다. 늦은 저녁 성안에는 돌아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는 계단을 뛰어 올라갔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누구를 만나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정원으로 가야 할지, 주방이나 도서관으로 가야 할지도 몰랐다. 그저 성안을 헤집고 다니며 누구든 사실을 확인시켜 줄 사람을 만나기를 원하고 있었다.
"아란!"
정신없이 두리번거리는 아란을 발견한 사람은 하에라였다.
"아란, 무슨 일이야? 왜 그렇게 돌아다니고 있어?"
하에라가 보기에 아란은 꼭 술 취해 돌아다니는 주정꾼 같았다. 어지러이 움직이는 발걸음에 어디를 보아야 할지 모르는 두 눈은 풀려있었고 항상 가지런하던 머리카락은 이리저리 흩어져있었다.
"넌 알고 있지?"
"무얼?"
"하슬라, 하슬라가 어떤 아이인지?"
"아…… 그거 말이야?"
하에라는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싶어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아란이 이제서야 소문을 듣고 찾아온 것 같았다.
"말해줘. 사실만."
"일단 내 방으로 가자. 여기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
아란의 쿵쾅대는 심장이 더욱 빠르게 뛰었다. 하슬라에게 진위를 확인하는 게 먼저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사실을 직접 대면하기 싫은 마음이 하에라의 뒤를 따라가게 만들었다.
"일단 진정하고 좀 앉아. 너 많이 힘들어 보여."
"난 괜찮아. 이제 말해줘. 숨김없이 다."
하에라가 소파에 기대어 앉자, 아란도 그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갑자기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무슨 이야기를 듣고 왔는지 모르겠지만 하슬라는 인간 세상에서 태어난 인간의 아이가 맞아."
"아니! 그런 거 말고!"
하에라는 아란이 단순히 자신이 퍼트린 소문을 듣고 온 게 아니라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자신이 엿들은 그것을 아란도 알고 온 듯했다.
"하슬라가 인간의 왕이 만든 아이라는 소리?"
하에라는 아란의 마음을 포기시키기 위해 사실을 확인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정도만을 걷고 올곧게 자란 아란이라면 하슬라의 출생이 그렇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 테니까.
"거짓인 거지? 진짜가 아닌 거지? 하슬라가 그럴 리가 없잖아."
"아니, 진짜야. 아버지에게 직접 들은 사실이야. 비슬이 비를 내리게 하려고 아버지를 유혹해서 만든 아이야. 우리는 그 사실을 알고도 가족으로 받아들여 주고 키워준 거야."
아란은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진짜였구나. 아란은 이 모든 것이 깨고 나면 잊힐 악몽이었으면 하고 바랐다. 하지만 발밑이 꺼지는 아찔한 감각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한데 왜 그렇게 하슬라에게 신경을 쓰는 거야?"
하에라가 일부러 아란에게 물었다.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든 아란은 하에라를 보지도 않고 방을 나와버렸다.
하에라는 지금은 기다리기로 했다.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아란이 더 이상 하슬라를 전처럼 대할 수는 없으리라 확신했다. 하에라는 아란을 잘 알았다. 특권을 누리고 사는 이들은 그것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