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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슬라 36화

by 백서향

아란은 더 이상 정원에 가지 않았다. 성안에서도 하슬라를 피해 다녔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하슬라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이 마음이 하슬라의 출생 때문인지 그 사실을 말해주지 않은 것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하에라와의 결혼 때문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피해 다닐수만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루하루 피가 말라가고 있었다.

하슬라는 매일 정원에서 오지 않는 아란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날 이후 아란을 볼 수 없었다. 그녀는 괜찮다고 했던 아란의 말이 거짓일 수도 있다고 생각되자 불안해졌다. 갑자기 변해버린 아란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아가씨 바빠요?"


도서관에 찾아온 제나는 하슬라의 눈치를 보며 살며시 다가왔다.


"이럴 때일수록 바빠야 하는 거 알죠? 나 좀 도와줄래요?"


"왜? 무슨 일 있어?"


"아가씨 모르셨어요? 폐하께서 말씀 안 해주셨나 봐요."


"성안에서 벌어지는 행사를 일일이 나에게 말해주시지는 않아. 난 공식적인 자리에 나가면 안 되니까."


"깜박하셨나봐요. 그러지 말고 저랑 가서 케이크 만들어요. 여기서 축 쳐져 있지 말고."


"알았어. 가자."


하슬라는 제나를 따라 주방에 내려와 계란을 깨기 시작했다. 도서관에 멍하니 앉아 있을 때보다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장작 타는 냄새 때문인지 마음이 안정되었다.


"그런데 진짜 무슨 행사가 있는 거야?"


"하에라 아가씨 약혼 발표가 있어서요. 하에라 아가씨도 별말 안 해요?"


"응. 하에라가 유난히 쌀쌀맞게 대해서 요즘 좀 그래."


"그렇구나. 원래 성격이 그러잖아요. 아가씨가 이해해요."


하슬라는 피식 웃으며 지나가듯 물었다.


"그런데 누구랑? 내가 아는 사람인가?"


"아란 도련님이요. 호위를 맡길 때부터 짐작은 했는…… 아가씨!"


하슬라가 놀라 일어서는 바람에 계란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깨져버렸다.


"뭐라고? 누구라고?"


"아란……."


하슬라는 제나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주방을 뛰쳐나왔다. 아란이 정원에 오지 않은 이유가 있었구나. 하슬라는 쿵쾅거리며 제멋대로 뛰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 정원으로 향했다. 일단 제 마음부터 진정시켜야 했다. 그리고 생각해야 했다.


시냇물에 연거푸 세수하고 나서야 하슬라의 심장이 제대로 뛰기 시작했다. 바닥에 주저앉은 하슬라는 어떤 것이 먼저일지 생각했다. 내가 인간이라는 것을 안 것과 하에라와의 결혼. 둘 중 어떤 것이 먼저였을까? 내가 인간이기 때문에 아란이 배신감을 느꼈던 것일까. 하지만 아란은 그날 분명 괜찮다고 말했었다. 아니면 아란이 알아버렸을까? 인간의 왕이 한 짓을? 그래서 내가 태어났다는 걸 알아버린 것일까? 그래서 하에라와 결혼하기로 한 것일까?


하슬라의 머릿속에서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결국 아란을 만나서 물어봐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태어난 자신을 경멸한다고 하면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막막했다. 아란의 다정한 눈빛과 떨리던 숨결이 아직도 생생하게 느껴지는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깊이 쉼호습을 한 하슬라는 다시 계단을 올라가 벽 앞에 섰다. 이제 현실을 마주할 시간이었다.


그녀가 벽을 밀고 나가자 아란이 그 앞에 서 있었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벽에서 나오는 여자아이를 보고 놀랐지만, 이번에는 하슬라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아란, 나한테 해 줄 말 없어?"


하슬라의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서 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그리고 다시 같이 정원으로 내려가서 같이 웃고 싶었다. 하지만 바닥을 내려다 본 채 꾹 다문 그의 입술에서는 핏기가 사라져가고 있었다. 주먹을 너무 세게 쥔 나머지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깊게 파였다.


"아란, 날 좀 봐."


하슬라는 울먹이면서 아란의 손을 잡았다. 아란은 정원에서 나온 하슬라를 본 순간 그녀가 모든 것을 알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래서 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아란, 아니지? 아니라고 말해줘. 장난친 거지? 날 놀라게 해 주려고 그런거지?"


아란이 입을 굳게 다물면 다물수록 하슬라의 얼굴은 눈물로 얼룩지고 있었다. 하슬라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란이 무슨 말이라도 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너도 나한테 할 말이 있으니, 여기까지 온 거잖아. 그러니 제발 무슨 말이라도 해줘."


"더러워."


아란은 하슬라의 손을 쳐내며 자신도 모르게 내뱉었다. 그 말에 하슬라보다 아란이 더 크게 놀랐다. 이러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닌데. 하슬라를 이해하고, 이해시키고 싶어서 온 길이었다. 하지만 제힘으로는 아무것도 어쩌지 못한다는 자괴감이 그런 말을 내뱉게 했다.


아란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은 하슬라를 내버려둔 채 그곳을 빠져나왔다. 차라리 잘되었다 싶었다. 하슬라에게 사실을 확인하고 이해한다 한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쳐 버릴 수는 없었다. 어차피 모든 일은 제 뜻과는 상관없이 흘러갈 것이고 앞으로 영원히 그럴 테니. 아란은 그냥 체념해 버리기로 했다. 하슬라도, 자신도.



하슬라는 어떻게 방까지 걸어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더러워.'


그 한마디가 모든 것을 설명해 주고 있었다. 더 이상 아란에게 물을 말도 들을 말도 없었다. 절망적인 체념이 그녀의 심장을 짓눌렀다. 한 번 더 버려졌다. 필요 없는 물건처럼. 존재 자체를 부정당한 내가, 가족의 사랑조차 받지 못한 내가 평온하게 그의 품에 안길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 게 어리석었다.


'넌 이것밖에 안 되는 존재야. 그래서 버려진 거야.'


거울 속 하슬라가 말하고 있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부정당한 존재가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한 게 죄라면 죄였다. 그녀는 깊은 자괴감에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웠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아니, 살아갈 수나 있을까. 나의 존재는, 나의 마음은, 산산이 부서져 더 이상 붙일 수 없는 조각들로 변해버린 것 같았다.


어둠이 짙게 깔리고 있었지만, 하슬라는 잠을 잘 수 없었다. 영원히 그럴 것만 같았다.



하슬라는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했다. 그늘진 눈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고, 몸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푸석해진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삐져나왔다. 하루가 다르게 수척해지는 하슬라를 걱정하는 건 제나뿐이었다. 성안의 모든 사람이 하에라의 결혼발표 준비에 바빴다.


그 날도 제나는 주방에서 과일을 손질하고 있었다. 하슬라 걱정에 한숨을 몰아쉬던 제나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도서관으로 뛰어 올라갔다. 저대로 놔두면 딱 굶어 죽을 것만 같아 보였다.


"아가씨. 아가씨!"


도서관에 들어갔지만, 하슬라가 보이지 않았다.


"어딜 가신 거지? 아, 아가씨!"


제나는 도서관 구석구석을 훑어보고 나가려 창가 구석진 곳에 쓰러져 있는 하슬라를 발견했다. 그녀는 하슬라를 흔들어 깨워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일으켜서 안아보려고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하는 수없이 도움을 청해보려고 도서관을 나갔다.


"아란 도련님!"


제나는 하에라의 방으로 들어가려는 아란을 보고 급히 불러세웠다.


"저 좀 도와주세요. 하슬라 아가씨가."


아란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도서관으로 전력 질주해 들어갔다. 아란은 하슬라를 두 팔로 번쩍 들어 올렸다. 너무도 가벼웠다. 아란은 하슬라를 안고 3층으로 급하게 올라갔다. 제나는 급하게 문을 열어주고는 침대로 안내했다.


"제가 물수건을 가져올 테니 아가씨를 지켜주고 계세요. 부탁해요."


제나는 급한 마음에 아란과 하슬라 둘 만을 남기고 방을 나갔다.


아란은 하슬라 얼굴 가까이에 대고 숨을 확인해 보았다. 느리기는 하지만 숨을 쉬고 있었다. 희고 앙상한 팔이 침대 아래로 떨어지자 살며시 다시 침대 위로 올려주고는 이불을 덮어주었다. 마지막 보았을 때보다 수척해진 얼굴을 차마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늘진 얼굴이 수척해지기는 아란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차라리 크게 아프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아란은 이불 밑으로 손을 넣어 하슬라의 손을 꼬옥 잡았다. 피가 모두 빠져나간 듯 차가운 손에 아란의 심장도 얼어붙는 것 같았다. 왜 행복한 나날들이 지속되기를 바라면 안 되는 것일까. 왜 우리는 이렇게 힘들어야만 하는 것일까.


"도련님, 조금만 비켜주세요."


제나가 대야에 따뜻한 물을 받아왔다. 그녀는 하슬라의 이마에 손을 얹어 보았다. 이마가 뜨겁다 못해 따가웠다.


"이리 줘, 내가 할게."


제나가 수건을 물어 적신 후 짜서 하슬라에게 다가서자, 아란이 수건을 재빨리 빼앗았다. 하슬라의 얼굴을 정성껏 닦던 아란은 그녀의 입술에 보자 눈물이 차올랐다. 허옇게 일어난 입술은 가느다란 핏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마음이 아플 때마다 얼마나 뜯고 또 뜯었을까. 아란은 수건을 하슬라의 이마에 올리고 침대에 얼굴을 파묻었다. 제나가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의사를 불러올게요."


의사가 무리한 것 같다고 푹쉬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한 후에도 아란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앉아 있었다. 제나는 이제서야 모든 일이 이해야 되기 시작했다. 그녀의 기억은 하슬라가 블루베리 머핀을 들고 나갔던 그날로 거슬러 올라갔다. 누군가의 마음을 얻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한동안 주방에 매달려 살다시피 한 하슬라가 어느 날부터 오지 않았던 것도 생각났다. 아란이 저보다 앞서서 하슬라 방으로 달려간 것도 이상했다.


"도련님 때문이군요. 아가씨가 저리된 게 소문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반은 인간이라서 이 세계에 속하지 못하는 괴로움 때문에 힘들어한다고요. 그런데 이상했어요. 아가씨는 금방 털고 일어날 줄 알았거든요. 다시 웃으면서 주방으로 뛰어 들어올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아란은 차마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렇게 될 줄 모르셨던 건가요? 아가씨에게 상처만 주고 끝날 인연이었다는 걸 모르지는 않으셨을 텐데요."


제나도 몰랐다. 그날 무심코 그 이야기가 하슬라를 저리 만들 줄은. 아란과 하에라의 결혼을 언젠가는 알게 되었으리라고 스스로를 위로해 보아도 후회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최소한 자신의 입으로 듣게 해서는 안 되었던 이야기였다. 지금 여기에 아란도 자신도 하슬라를 걱정할 자격조차 되지 않는다.


"폐하나 다른 분들이 보시기 전에 어서 나가세요. 이제 아가씨는 도련님과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에요. 어서요!"


제나는 아란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아란의 얼굴이 눈물과 땀으로 얼룩져 있었다. 제나의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하슬라가 '끙'하는 소리와 함께 몸을 뒤척이자 제나는 재빨리 아란을 밖으로 밀어냈다.


'가엾은 분.'


제나는 하슬라의 얼굴을 정성껏 닦고 또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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