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에라와 아란의 결혼 발표가 있었다. 결혼식은 하에라가 스무 살이 되는 해 5월로 정해졌다. 따라서 하슬라의 결혼도 서두르게 되었다. 후계자가 아닌 자식은 스무 살이 넘으면 결혼을 한 후 성밖을 나가는 게 관례기는 해도 힐조는 이전보다 훨씬 더 급했다. 소문이 생각보다 더 빠르고 악의적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소문을 잠재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당사자를 치워버리는 일일 것이다.
힐조는 대신들 자제 중 하슬라와 결혼시킬 남자를 물색해 보았다. 하지만 소문 때문에 모두 이 결혼을 꺼리고 있었다. 비를 내리게 하려는 인간 왕의 욕심이 낳은 괴물이라는 소문은 이미 알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힐조는 머리가 아팠다. 처음부터 받아들이지 말았어야 하는 마음까지 들 정도였다. 하지만 땅이 꺼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었다. 하슬라는 왕의 사생아였다. 그러면 상대방도 그런 조건을 가진 사람 중에서 찾으면 될 터였다. 힐조는 사람을 시켜 대신들의 모든 자식을 조사하라고 시켰고 마침내 하슬라에게 맞는 짝을 발견했다. 왕실에 들어오는 물품을 관리하는 대신의 망나니 사생아였다. 힐조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제 마음을 성가시게 했던 바론에 대한 앙갚음이기도 했다.
힐조는 그를 한껏 꾸며 바론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바론은 그를 써 내켜 하지는 않았으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힐조에게 한 약속은 지켜져야만 했다. 하슬라는 지금껏 잘 살아왔고 앞으로도 강하게 잘 헤쳐 나가리라 생각한 바론은 이 결혼을 허락했다.
하슬라의 결혼은 하에라의 결혼 바로 다음 달이었다. 힐조의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결혼시켜 내보내고 싶었지만 하에라를 생각해서 그럴 수가 없었다. 가장 화려한 주목을 받아야 하는 사람은 다음 후계자인 자신의 딸 하에라였다.
하슬라는 자신의 결혼 소식을 소문으로 듣고 알았다. 쓰러진 이후로 하슬라는 오기로 먹고 일을 했다. 그 어떤 생각도 끼어들지 못하도록. 하지만 지금 또다시 사람들은 그녀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폐하께서 부르세요. 집무실로 오시랍니다."
힐조의 시녀가 쌀쌀맞은 목소리로 하슬라를 불러냈다. 이제 성안에 그 누구도 그녀를 존중해주지 않았다. 제나만 빼고. 하지만 제나도 그날 이후 하슬라에게 미안한 나머지 예전처럼 대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하슬라는 숨만 붙어있는 껍데기로 살아가는 기분이었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집무실에 들어서자 인자한 미소를 띤 힐조가 그녀를 먼저 맞아주었다. 바론은 하슬라에게 앉으라 권하면서 자신도 소파로 내려앉으며 찻잔을 집어 들었다.
하슬라는 바론과 힐조에게 허리를 크게 숙여 각각 인사를 한 후 바론을 쳐다보았다.
"앉거라."
"괜찮습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앉았으면 좋겠구나."
하슬라는 속으로 한숨을 내쉰 후 최대한 멀리 있는 소파에 푹 주저앉았다.
"오늘 부른 건 다름이 아니라…… 너도 이제 스무 살이 되니 전통에 따라 결혼해야 하지 않겠니?"
"알고 있습니다. 길게 설명하실 거 없으세요. 명 받들겠습니다."
"그래도 내 말을 들어주었으면 좋겠구나."
바론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하슬라를 바라보았다. 그는 예전처럼 하슬라가 '싫다'는 말을 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바론은 자신이 아닌 하슬라가 그것을 해주었으면 했다.
"폐하와 왕후의 명이니 그대로 따르는 게 당연한 거잖아요. 더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
"아니다. 네가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구나. 남편 될 사람 얼굴을 결혼식 당일에 봐도 좋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니?"
힐조의 한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어떤 의도로 저렇게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성가신 일은 줄었구나 싶었다.
"네. 어차피 좋아서 하는 것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겠어요?"
"그래. 그럼, 그만 나가보거라. 앞으로 결혼식 일정은 나와 의논하면 된단다."
"전 그저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하슬라의 쌀쌀맞은 태도에 바론은 하고 싶은 말들을 깊숙이 넣어두었다. 이제 제 손을 떠난 일이었다.
하슬라는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허리를 깊이 숙여 둘에게 인사를 한 뒤 집무실을 나왔다. 그녀는 속이 답답해져 왔다. 예전부터 느껴왔던 답답함이었지만 오늘은 정말이지 참을 수가 없었다. 바론은 하에라의 아버지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아버지였다. 정말 단 한 번이라도 아버지라는 역할에 충실할 수는 없었는지 궁금했다. 자신에게는 인자한 아버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분노가 치솟았다. 아무리 정 없는 자식이라고는 하나 얼굴도 모르는 남자에게 치워버리듯 결혼시키려는 그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럴 거면 거두어 키우지나 말지. 차라리 제단에서 죽어버리게 내버려두지.
하슬라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꾹꾹 눌러 담으며 복도를 걸었다.
"결혼한다며?"
아란의 목소리였다. 하슬라는 차마 아란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순간 그를 마주하게 되면 어떤 분노가 터져 나올지 저도 알 수가 없었다. 하슬라는 그가 없는 듯 지나쳐 가려고 제 발끝만 보고 한 걸음씩 힘주어 걸어 나갔다.
하지만 아란의 팔이 하슬라를 잡아챘다. 하슬라는 온 힘을 다해 그 팔을 뿌리쳤지만, 아란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무슨 짓이야? 이거 놔."
"그 결혼 꼭 해야겠어?"
하슬라를 보는 아란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곧이어 아란의 얼굴이 하슬라의 뺨에 닿을 듯 다가왔다.
"네가 무슨 상관인데?"
하슬라가 아란을 밀어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대신 하슬라는 다른 쪽 팔꿈치로 아란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아란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팔에 힘을 풀었다. 하슬라는 빨갛게 부어오른 팔을 만지며 아란을 째려보았다. 아란은 허리를 숙인 채 두 손을 옆구리에 얹고는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순간 일그러진 몸짓 너머로 보이는 슬픔이 하슬라의 눈에 보이고 말았다. 하슬라의 심장이 꺼질 듯 아래로 내려앉았다.
"내가 널 더 이상 미워하게 하지마."
하슬라는 나오는 울음을 억지로 밀어 넣으며 제 방으로 올라갔다.
그날 밤 하슬라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꼭 이 성에 들어왔던 그날 같았다. 이리저리 뒤척이던 하슬라는 정원으로 내려갔다.
더 이상 정원은 그녀에게 위로가 되어주지 않았다. 보랏빛 불빛조차 힘없이 계단을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녀의 뺨을 간지럽히던 바람도 귀를 즐겁게 해주었던 시냇물 소리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다. 반짝이며 잎을 떨구어내던 자작나무조차 이젠 하슬라의 시선을 끌지 못했다.
그녀의 초점 없는 눈동자가 어지러이 떠다니다 한곳에 머물렀다. 덩굴이 자라오르던 곳이었다. 지금도 그때와 마찬가지로 덩굴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었다. 인간들은 여전히 이곳으로 와서 덩굴을 건드려 보는 듯했다. 그 아이도 그랬을까? 하슬라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남자아이가 생각났다. 배고픔을 참지 못해 과일을 허겁지겁 먹던 아이는 하슬라에게 비를 내리게 해달라고 부탁했었는데.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쯤 저보다 큰 남자가 되어 있겠지 싶었다.
하슬라는 덩굴로 내려가 보았다. 그리고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곳에 사람이 드나들 만한 구멍을 만들었다.
'이대로 밖으로 나가버린다면.'
하슬라는 구멍으로 몸을 넣어보았다. 이대로 빠져나간다면 인간 세상으로 나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덜컥 겁이나 몸을 안으로 빼냈다. 비가 오지 않아 배를 곯는다는 그 아이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인간인 내가 인간 세상에 사는 것이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결혼도 하지 않아도 되고 더 이상 아란과 하에라를 보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슬라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제 곧 하에라의 결혼식이 있을 예정이었다. 하슬라는 구멍을 한동안 쳐다보다 몸을 돌렸다. 계속 이곳에 있다가는 정말 도망쳐버릴 것만 같았다.
"제나, 난 인간인 거겠지?"
하슬라는 주방에 가지런히 정돈되어 걸려 있는 주방 기구들을 하나하나 만지며 허공에 대고 말했다. 특히 구리로 만든 냄비는 버터를 녹일 때 하슬라가 즐겨 사용하던 도구였다. 노끈으로 감아 놓은 손잡이 부분이 반들반들 해져 있었다. 그때의 감촉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아가씨,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자 봐봐. 내 목에는 표식이 없어. 인간처럼. 그러니까 난 인간이고 인간 세상에 살아야 하는 게 맞는 거겠지."
"난 아가씨가 여기서 오래오래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아가씨가 사는 모습을 내가 지켜볼 수 있잖아요."
하슬라는 제나의 얼굴을 한동안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새삼스럽게 왜 그렇게 보세요?"
"난 제나가 우리 엄마였으면 좋겠어. 그런 생각을 참 많이 했었어."
"나도 그랬어요. 내가 아가씨 엄마였으면 하는 생각을 했어요."
"내가 제나 없이 살 수 있을까?"
"왜 이래요? 멀리 가는 것도 아니면서. 결혼해도 성에 자주 놀러 오세요. 저도 눈치껏 아가씨를 찾아갈게요."
하슬라는 제나를 힘껏 안았다. 언제나 제나의 품에 안기기만 했었는데 이제는 제나를 안아 줄 만큼 커버렸다.
"아가씨, 이상하다. 무슨 일 있어요?"
"또 무슨 일이 있을려고. 지금까지 벌어진 일만해도 힘든데."
"아가씨……."
제나는 하슬라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열 살의 하슬라도 스무 살의 하슬라도 감당하기 힘든 일을 너무도 많이 겪었다. 어른도 견디기 힘든 그 일들을. 제발 이제는 마음 편히 살 수 있기를 제나는 빌고 또 빌었다.
"제나, 건강해야 해."
"어? 진짜 이상한데요. 아가씨."
"아니야. 벌써 제나가 보고 싶어서 그래. 따뜻하게 안아줘서 고마웠어."
"나도요. 나한테 안겨줘서 고마웠어요."
하슬라는 제나의 온기를 느끼며 결심을 굳혔다. 이곳을 떠나 인간 세상으로 가기로. 이곳에서는 더이상 그녀의 자리는 없었다. 처음부터 이래야 했는데 너무 늦은 것은 아닌지 그것이 걱정스러울 뿐이었다.
하에라의 결혼식을 며칠 앞두고 하슬라는 간단히 짐을 챙겼다. 옷 몇 가지와 돈이 될만한 물건들을 넣었다. 인간 세상에서는 돈이나 보석으로 물건을 사고판다는 것을 책에서 읽었기 때문이었다. 하슬라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편안했다. 인간 세상으로 나가서 사는 일이 고단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하루를 살더라도 마음만은 편하게 살고 싶었다. 하슬라는 제나에게 짤막한 편지를 남기고 정원으로 나갔다.
밤공기에 봄기운이 묻어있었다. 찬바람과 따뜻한 바람이 한데 어우러져 하슬라의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날렸다. 하슬라는 정원을 크게 한 바퀴 돌아보았다. 마음 붙일 곳 없던 나를 살게 해 준 곳. 이제 이곳을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몰랐다. 눈으로 하나하나 담던 하슬라는 시냇물에서 멈추었다.
'아란.'
정원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따라 올 얼굴이었다. 아직도 그의 따스한 손길과 다정했던 웃음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하지만 이제 정원도, 아란도 이곳에 내려놓고 떠나야 했다. 다시는 그리워하지 않을 마음으로 하슬라는 덩굴 사이를 헤치고 인간 세상으로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