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무도 하슬라가 없어진 것을 몰랐다. 그녀의 방을 청소하던 시녀가 제나에게 쓴 편지를 가지고 올 때까지도 그랬다. 제나가 편지를 읽고 그것을 바론에게 급히 가져다준 후에야 하슬라가 성을 빠져나가 인간 세상으로 갔다는 것을 알았다.
"당장 병사들을 풀어 하슬라를 찾으라고 해라!"
바론은 흥분하며 하슬라를 찾으라 명령했지만 힐조가 바론의 손을 잡으며 그 명령을 거두었다.
"폐하, 차분히 생각하셔야 합니다. 지금 병사들을 인간 세상으로 보낸다는 것은 전쟁을 하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습니다. 이제나저제나 꼬투리 잡을 일만 노리고 있는 비슬입니다. 왜 그에게 칼자루를 쥐여주려고 하십니까?"
"그럼 이대로 그냥 두고 보자는 말입니까? 다른 곳도 아니고 인간 세상에 나간 아이를 어떻게!"
"제가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조금만 기대려 주세요. 폐하."
힐조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제 스스로 나가주다니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결혼해서 성을 나간다 해도 이런저런 문제로 속을 끓일 수도 있었는데 그런 문제를 모두 없애준 것만 같았다. 다만 바론을 어떻게 달래느냐가 문제였다. 찾는 척이라도 해야 화를 누그러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집무실을 두드리는 이가 있었다.
"폐하, 무들입니다."
"때마침 잘 왔어. 그런데 이 사람은……."
"인간입니다. 성 안을 배회하고 있던 걸 병사 하나가 잡아들였습니다."
무들은 잡아 온 남자를 밀어 넘어뜨렸다. 그의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지만, 주변을 훑는 눈만큼은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넌 누구냐?"
"라…… 온입니다."
무들이 목덜미를 가리키며 인간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여기는 어떻게 들어온 것이야?"
바론의 인내심이 바닥을 쳤다. 하슬라가 도망친 인간 세상에서 들어 온 인간이라니. 이건 있을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덩굴 사이에 구멍이 있어서……."
말을 몰 수 있게 된 라온은 거의 매일 덩굴이 있는 곳으로 말을 타고 왔다. 하지만 언제나 뒤엉켜 있는 덩굴을 보며 좌절하고 돌아갔다. 빽빽이 엉켜 있는 덩굴 사이로는 정원에서 자라나는 나무조차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작은 틈조차 없던 덩굴 사이로 사람 한 명이 드나들 수 있는 구멍이 나 있었다. 라온은 살짝 기대했다. 예전처럼 하슬라가 자신을 기억하고 만들어 놓은 구멍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망설이지 않고 구멍 사이로 들어갔다. 제 몸보다 작은 구멍에 욱여넣느라 옷이 찢어지고 살이 까졌지만 상관없었다. 하슬라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아픈 줄도 몰랐다.
정원은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어두웠다. 하슬라가 만들어 내는 보랏빛 불빛을 기대한 라온은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하기는 싫었다. 더듬거리며 정원을 돌아다니다 계단을 발견한 그는 망설이지 않고 그곳을 올랐다. 계단 끝에 다다른 라온은 한 번 더 좌절했다. 문이라고는 찾을 수가 없었다. 그대로 돌아가려던 라온의 손에 틈이 만져졌고, 그는 그대로 그것을 밀어버렸다.
그는 성안을 조심조심 돌아다녔지만 결국 순찰을 돌던 경비병에게 걸려버렸다. 단순 침입자인줄 알았던 경비병은 그가 인간이라는 것을 알자 무들에게 알렸고, 무들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바론에게 달려왔다.
"인간이 감히 신의 영역에 들어오다니! 그냥 넘어갈 사안이 아니다. 이 자를 감옥에 가두거라. 내가 직접 심판하겠다."
진노한 바론과는 달리 힐조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올랐다. 행운의 여신이 자신에게 자꾸만 웃음을 지어보이는 것 같았다.
"폐하, 역정 그만 내시고 제 말을 들어보세요."
"지금은 들을 기분이 아닙니다. 나중에 하도록 해요."
"지금 해야 할 말입니다. 잠시만 시간을 내주세요."
힐조는 바론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일단 그의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다.
"폐하의 기분은 알겠으나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할 일입니다. 하슬라를 찾되 비슬을 건드리지 않아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래서요?"
"저자로 하여금 하슬라를 찾게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저자를 어떻게 믿습니까?"
"믿지 못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인간 세상을 잘 아는 건 신의 영역에 있는 자들이 아니라 인간입니다. 그러니 속는 셈 치고 저를 한번 믿어보세요."
"다른 일도 아니고 하슬라를 찾는 일입니다. 어찌 한낱 인간한테 맡긴단 말입니까?"
"인간 세상에 병사를 푸는 것도 방법은 아닌 것 같습니다."
바론은 심호흡을 여러 번 한 뒤 차분하게 생각해 보았다. 힐조의 말이 틀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선뜻 동의할 수도 없었다. 바론은 자신이 감정적으로만 이 일을 대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보았다.
"알겠어요. 일단 그렇게 하도록 해요. 하지만 약속한 시간이 지나면 내 방식대로 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폐하."
힐조는 바론을 응접실에 놔둔 채 집무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라온을 남긴 채 모든 사람을 나가도록 했다.
"여기 진짜 온 이유가 무엇이냐?"
"그냥 호기심에 들어와 봤습니다. 덩굴이 빽빽이 들어 차 있는 곳에 구멍이 보이길래 저도 모르게 그만."
"보라색 머리카락을 가진 아이를 보았나?"
힐조는 라온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보았구나."
"아닙니다."
"거짓말을 하는 건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아."
"정말 보지 못했습니다."
"폐하께서는 너를 죽이실 생각이다. 지금 화가 아주 많이 나셨거든. 하지만 나는 너를 살려 줄 생각이야. 넌 아주 쓸모가 많은 것 같거든."
"살려주십시오."
라온은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랐다. 단지 하슬라가 보고 싶어서 온 길이었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 보라색 머리카락을 가진 아이를 찾아오면 모든 것을 없던 일로 해주지.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제가 어떻게 그 아이를 찾는단 말입니까?"
"그건 네 사정이고. 만약 한 달 안에 그 아이를 찾아오지 않는다면 폐하께서는 어떻게든 너를 찾아내어 너의 목숨을 거둘 것이다. 그리고."
라온의 손발이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하슬라의 보라색 불빛이 눈에 선했다.
"인간 세상에 비를 내려주지 않을 것이다."
라온은 입술이 타들어 가는 것을 느꼈다. 제 목숨이 문제가 아니었다. 인간 세상에 비가 더 이상 내리지 않는다면, 그래서 예전처럼 돌아간다면 생각하기도 싫었다. 끔찍한 악몽이 더 나을 지경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라온의 입이 저절로 움직여 대답했다. 고민할 것도 생각할 것도 없었다. 어떻게든 하슬라를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