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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슬라 40화

by 백서향

"이건 또 뭐야?"


매디는 가게 앞에 쓰러져 있는 담요 덩어리를 발로 툭툭 차보았다. 꿈틀거리던 담요 덩어리에서 사람의 얼굴이 빼꼼히 나오자 매디는 인상을 찡그렸다.


"어디 잘 데가 없어서 남의 가게 앞에서 이러고 있는 거야? 아가씨 술 마셨어? 집이 어디야?"


하슬라는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밀어 올렸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를 건장한 사람이 팔을 허리에 댄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팔을 움직여보려 했지만 신음만 나올 뿐 힘겨웠다. 다리도 마찬가지였다.


"뭐 꾸물대고 있는거야? 말을 못해?"


하슬라는 있는 힘을 다 몰아서 겨우 일어나 앉았다. 긴장한데다 한데서 잠이 들어서 그런지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아! 어서 안 일어나고 뭐 하냐니까?"


매디가 하슬라 앞으로 다가오자 겁먹은 그녀는 앉은 채로 뒷걸음질을 쳤다. 신음이 절로 나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어 그 소리가 나오는 것을 막아야 했다.


매디는 겁먹고 뒷걸음치는 여자를 보니 소리친 게 약간 미안해졌다. 예전 라온이 바로 저 자리에서 자다가 자신에게 들켰던 기억이 떠올라 화났던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지기도 했다.


"밤새 여기서 잔 거야?"


"죄송합니다."


더 이상 소리를 지르지 않는 매디에게 하슬라는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떨어진 눈물에 매디가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지만 사실, 더 하슬라가 더 당황하여 빠르게 눈물을 훔쳐내었다.


"이러려고 그런 건 아닌데 죄송합니다."


하슬라는 온 힘을 다해 몸을 일으킨 후 연신 고개를 매디에게 고개를 숙였다. 헝클어진 머리와 부어있는 얼굴에 든 멍, 너저분해 진 옷과 흙범벅이 된 망토까지. 매디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유심히 들여다보자 화났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오히려 안쓰러운 마음까지 생긴 그녀는 하슬라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하지만 하슬라는 겁먹은 얼굴로 뒤로 물러나면서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어제 맞았던 기억이 다시 떠올라 몸이 제멋대로 떨리고 있었다.


"이런. 무슨 일이 있었던 게로구나. 이리 들어와 일단 요기부터 하자."


매디가 하슬라의 팔을 살며시 잡아 가게 안으로 이끌자 하슬라는 못 이기는 척 따라갔다.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기는 했으나 나쁜 사람은 아닌 것만 같았다.


매디는 의자를 빼내 주며 톡톡 쳤다. 하슬라는 느릿느릿 의자에 기대어 앉아 식탁을 내려다 보고만 있었다. 감히 그곳을 둘러볼 생각도, 매디를 쳐다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자, 이거부터 먹어봐. 밤새 밖에 있었으니, 몸이 얼음장 같을 테니 따뜻한 거 먹고 몸부터 녹이자."


하슬라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프를 보자 침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딱딱하게 굳은 손가락이 펴지지 않아 숟가락을 자꾸 놓쳐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매디가 하슬라의 손을 덥석 잡았다. 당황한 하슬라가 손을 억지로 빼내려고 했지만 매디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매디는 하슬라의 손을 제 손안에 넣고 비비며 따뜻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굳었던 마디가 풀릴 때쯤 매디는 하슬라의 손에 숟가락을 쥐여 주고는 수프 그릇으로 가져다 주었다.


스프를 떠먹은 하슬라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눈물 나게 따뜻하고 맛있었다. 쏙 들어갔던 눈물이 스멀스멀 나오려고 하고 있었다. 왠지 이번에는 그냥 나오게 두어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몰골이 말이 아닌데."


"가방이랑 돈을 괴한에게 빼앗겼어요. 겨우 도망쳐서 정신없이 달리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거예요."


"저런. 몸은 괜찮고?"


매디의 말에 하슬라는 손으로 뺨을 감싸며 눈을 질끈 감았다. 매디는 그 모습에 혀를 차며 인상을 찌푸렸다.


"더는 물어보지 않을 테니 마음 놓고 수프부터 먹어. 모자라면 더 얘기하고."


"감사합니다."


매디는 일부러 자리를 피해 주방으로 들어갔다. 하슬라는 그제야 허겁지겁 수프를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자 다시 눈물이 밀려 나오기 시작했다. 입안에서 나오는 흐느낌을 손으로 틀어막아 봤지만 역부족이었다. 조금씩 밀려 나오던 소리가 주방에까지 닿았다. 어쩌다가 저리된 것인지 안쓰러운 마음에 매디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소리가 잦아들고 숟가락이 접시에 부딪히는 소리가 그치자 매디가 주방에서 나왔다.


"집은 어디야?"


"집에서 쫓겨났어요."


하슬라는 매디의 눈을 피하며 대답했다.


"그럼 어쩌려고? 갈 데는 있고?"


"아니요."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젓는 그녀의 모습에 매디는 괜한 오지랖이 발동했다. 어차피 어쩌다 집에서 나오게 되었냐고 물어봤자 대답을 들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돈과 가방을 빼앗긴 여자가 길거리에 돌아다니다 무슨 봉변을 당할 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럼 며칠만이라도 여기에 있을래? 그냥 놀고 먹는 건 안되고 주방 일을 도와주든 밭일을 도와주든 해야만 해. 안 그러면 바로 쫓아낼 테니."


"정말요? 정말 그래도 돼요?"


"그럼."


"저 먹여주고 재워주시기만 하면 돼요. 시키시는 일 뭐든지 다 할게요."


하슬라는 성을 나오고 난 후 처음으로 활짝 웃었다. 죽으란 법은 없구나. 어제 그 남자로부터 도망칠 때만 해도 살길이 없을 것만 같았다. 정신없이 뛰다 강물 소리를 들었을 때 그 길을 따라 정신없이 걷기 시작했다. 아무리 걸어도 집 비슷한 것도 나오지 않자 나무를 붙잡으며 숨을 헐떡이고 있는데 저 멀리 희미한 불빛이 아른거렸다. 하슬라는 남은 힘을 모아 그곳까지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기둥 사이에 몸을 누이면서도 그녀는 그곳이 헛간인 줄로만 알았다. 오늘 아침 일어나서야 맨바닥에서 잤다는 것을 알았다. 당장 며칠 만이라도 따뜻하게 자고 배를 곯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할 시간도 벌었다.


"뭐부터 할까요?"


매디의 생각이 바뀔까 급한 마음에 하슬라는 벌떡 일어났다.


"일단 그 몰골부터 어떻게 좀 해야 하겠는데."


하슬라는 제 몸을 훑어보았다. 지금 자신을 사람으로 대해주고 있는 게 이상할 정도로 허름하고 처참한 꼴을 하고 있었다. 민망해진 하슬라는 괜히 머리를 긁적이며 난감한 얼굴로 매디를 쳐다보았다.


"좀 씼어야 겠다. 물을 데워줄 테니 잠깐만 기다려. 라온, 라온!"


매디는 라온의 방으로 가서 문을 벌컥 열었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뭐야! 일찍 나간 거야? 아니면 아직 들어오지 않은 거야? 일 좀 시키려고 했더니만."


하는 수없이 매디는 직접 물을 데우고 하슬라의 목욕물을 받아주었다.


"대충 씻어. 난 꾸물거리는 꼴은 못 보는 성격이라."


"네. 그런데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난 매디야. 그냥 사장님이라고 부르면 돼."


"전 하슬라에요. 사장님."


따뜻한 물로 씻은 하슬라는 더러워진 옷을 그대로 입고 나왔다. 갈아입을 옷이 없었을뿐더러 친절을 베풀어 준 매디에게 옷까지 내놓으라고 할 수는 없었다. 흙 뭍은 옷을 몇 번 털어내자 그런대로 입을만했다.


"이제야 사람같구나."


매디의 눈에도 풍성한 보랏빛 머리카락이 제일 먼저 들어왔다. 큰 눈망울에 뽀얗고 하얀 얼굴을 보니 형편이 어려운 집에서 자란 아이는 아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일이나 제대로 할 수 있으려나하는 걱정도 되었다.


"일단 빗자루로 식당 청소부터 해봐. 원래 일 하던 녀석이 있는데 오늘 어디로 내뺐는지 보이지를 않네."


하슬라는 빗자루를 받아 들고 정성껏 비질을 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능숙하게 해내는 모습을 보던 매디는 마음 놓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어머니, 저 왔어요."


"아니, 이 녀석이 어디를 갔다가 이제 온 거냐!"


매디는 하슬라의 손에 있던 빗자루를 뺏어서 라온에게 매질을 하기 시작했다.


"아! 사정이 있었어요. 아! 죄송해요. 아파요, 어머니!"


"아프라고 때리지. 그럼, 간지러우라고 때리겠니?"


"인제 그만 하세요. 어머니 힘드시잖아요."


매디가 들고 있던 빗자루를 빼앗은 라온은 그대로 그녀를 안아버렸다. 매디도 못 이기는 척 라온을 살짝 밀었다.


"악!"


그러다 하슬라를 발견한 라온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하슬라가 다시 올까 밤새 골목에서 떨다 이제 들어 온 라온의 눈앞에 그녀가 있었다.


"뭘 그리 놀래?"


"누구에요? 아니, 어떻게 된거예요?"


"그렇게 됐다. 어서 장사 할 준비나 해."


놀란 토끼 눈으로 하슬라를 보고 있던 라온에게 하슬라는 천천히 다가왔다.


"저 혹시 그 가방 어디서 났어요?"


방금 들어 온 남자가 제 것이랑 똑같은 가방을 들고 서 있었던 것이다.


"이거요? 어제 웬 여자가 괴한에게 당하고 있길래 뺏어서 가지고 있었어요. 밤새 기다렸는데 다시 오지 않아서 보시다시피 제가 가지고 왔어요."


"정말요? 감사합니다. 어제 저를 구해 주신 분이시군요. 정말 감사했어요. 그거 제 것이에요. 제가 어제 너무 무서워서 그냥 도망쳐 버렸어요. 그런데 혹시 보석이 든 꾸러미는 보지 못하셨나요?"


라온은 잠시 망설였다. 제 주머니 안쪽에 있는 꾸러미를 당장 내놓을까도 했지만, 마음을 바꾸었다.


"아니요. 그건 못 봤는데요."


"그렇군요."


라온은 가방을 하슬라에게 건내며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남자에게 맞은 뺨은 붉게 부어올라 있었고 옷에는 군데군데 흙이 묻어 있었다.


"괜찮아요? 어제 많이 힘들었죠?"


"이제 괜찮아요. 덕분에요."


"다행이네요."


"뭘 멀거니 서 있어. 일이나 해."


매디는 라온의 등을 툭 치며 주방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어떻게 된거예요?"


"너야말로 어떻게 된 거냐?"


"들은 대로에요. 괴한한테 당하고 있던 여자를 구해줬는데 사라져 버려서 짐을 가지고 왔을 뿐이에요."


"여자가 예뻐서 그랬던 건 아니고?"


"아! 어머니. 너무 하시네. 여자가 당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냥 지나칩니까? 그건 그렇고 왜 여기 있는 거예요?"


"가게 앞에 쓰러져 있길래 들어오라고 했다. 처음에는 내쫓아 버리려고 했는데 예전 네 생각이 나서 그냥 돌려보낼 수가 없었어. 그때 너를 받아준 게 내가 가장 잘한 일이었잖니. 이번에도 내 직감을 믿어보기로 했다."


"잘하셨네요."


"그래서 말인데 네 방을 당분간 저 애한테 줘야겠다."


"네? 왜요?"


"그럼 여자를 차가운 식당에서 재워야겠니?"


"어머니 집으로 데리고 가시면 되잖아요."


"우리 집은 방이 하나라서 안 돼. 그리고 난 모르는 사람 집으로 안들인다고 몇 번을 얘기하니?"


"그래도요."


"당분간이야. 때가 되면 알아서 내보낼 테니 걱정말거라. 이제 옷 갈아입고 와서 진짜 일 시작해!"


라온은 열심히 청소하는 하슬라를 지나쳐 밖으로 나갔다. 옷 안쪽에서는 두둑한 꾸러미가 느껴졌다. 이걸 바로 건네면 하슬라는 분명 이곳을 바로 떠나버릴 것이었다. 하슬라는 대체 왜 성을 떠나서 인간 세상으로 들어온 것일까? 풍요롭기만 한 그곳에서의 삶을 놔두고 힘겨운 이곳으로 온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라온은 하슬라를 다시 성안으로 데려가야 한다는 생각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제 발로 나온 성에 어떻게 다시 들어가게 한단 말인가. 폭력을 행사해서라도 데려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라온은 절대 그렇게는 하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한 달. 어떻게든 하슬라를 설득해 제 발로 돌아가게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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