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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슬라 41화

by 백서향

"넌 이름이 뭐야?"


라온은 시치미를 뚝 떼고 물었다.


"하슬라에요."


"난 라온이야. 어차피 나이도 비슷해 보이는데 말 편하게 해도 돼."


"네. 아니, 응."


"그런데 나 어디서 본 적 없어?


"죄송해요. 어제는 경황이 너무 없어서 얼굴을 보지 못했어요.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말 편하게 하라니까."


라온은 아쉬우면서도 씁쓸했다. 하슬라는 어렸을 적 자기 얼굴도, 이름도 기억하고 있지 못했다. 하긴 10년이나 된 일을 기억한다는 것도 어불성설이었다. 첫눈에 반한 자신과는 달리 하슬라에게는 그저 굶주리고 더러운 인간 아이였을 테니까.


"여기가 앞으로 네가 지내게 될 방이야. 원래는 내 방인데 어머니께서 너에게 양보하라고 하셔서."


"그럼 넌?"


"난 식당에서 지내면 돼."


"여러 가지로 고맙고 미안하네."


"뭐, 이까짓 거 괜찮아. 예전에는 더한 데서도 자봤는데 뭘. 잘 때는 꼭 안에서 문을 잠그고 자야 해. 들짐승들이 먹이를 찾아 들어올 때가 있거든."


하슬라는 순간 움찔했지만, 곧 평정을 되찾았다. 남자에게 맞았던 기억이 순간 스쳤던 것이다.


"뭐 내가 있으니까 괜찮을거야."


라온의 능글맞은 웃음에 하슬라도 슬며시 따라 미소를 지었다.


식당 일은 성안에서의 주방 일과는 많이 달랐다. 모든 것이 갖추어진 주방에서 차고 넘치는 재료들로 음식을 만들었던 그곳과는 달리 이곳에서는 되는대로 음식을 만들었다. 그때그때 넣는 재료도 달라졌고, 조리법도 달라졌다. 그 모든 것을 매디는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고 있었고, 하슬라는 그저 음식을 나르고 재료를 다듬는 일을 도울 뿐이었다.


가끔 새로 온 직원에 대해 흥미를 갖는 손님들이 있었지만 언제나처럼 매디의 큰 목소리가 그들을 제압했다.


소란스러운 점심시간이 지나자 식당은 한가해졌다. 매디는 앞치마를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채 밖으로 나가버렸고, 라온과 하슬라만이 식당 안을 정리하고 있었다. 라온은 슬쩍슬쩍 하슬라를 쳐다보곤 했지만 그녀는 자기 일만 묵묵히 할 뿐이었다. 라온은 어떻게든 하슬라와 친해져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그녀의 곁은 계속 맴돌았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면 물어봐 그렇게 안절부절못하지 말고."


"티가 많이 나?"


"지나가는 사람이 봐도 알 정도로."


겸연쩍어진 라온은 하슬라에게 슬며시 다가왔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하슬라를 성안으로 데리고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라온은 동시에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첫눈에 반한 여자아이가 지금 눈 앞에 있다. 그렇다고 예전의 그 남자아이를 기억하고 있느냐고 묻고 싶지는 않았다. 라온은 지금의 모습으로 하슬라가 자신을 바라봐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더럽고 자신감 없던 그 아이를 잊어주길 바랐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조금 더 욕심을 부리자면 성으로 돌려보내는 한이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그녀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둘이 뭐 꾸물대고 있어. 밖으로 나가서 시든 채소들이나 뽑아서 내다 버려. 이 놈의 비는 또 언제 올는지. 이제 한창 자라나야 할 시기인데 큰 일이네."


하슬라와 라온은 식당 앞에 있는 밭으로 나왔다. 예전과는 다르게 규모가 크고 농작물도 많이 있었지만, 한 달이 넘게 비가 오지 않은 탓에 여기저기서 농작물들이 시들어가고 있었다.


"다시 자라지 못할 정도로 말라버린 것들을 뽑아서 한 군데 모아놓으면 돼. 여기 장갑. 할 수 있겠어?"


"응. 그런데 비가 그렇게나 많이 오지 않았어?"


하슬라는 여전히 모르고 있었다. 인간 세상에 비가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리고 왜 그런지도.


"이제부터가 문제야. 무더위가 시작될 텐데 농작물이 다 말라 죽을 수도 있거든. 강물을 퍼 올려서 물을 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비가 오지 않으면 어차피 강물도 다 말라버릴 테니까."


하슬라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라비틀어진 토마토 덩굴을 뽑았다. 잎이 말라 손 안에서 바스락 소리를 내며 부서져버리고 겨우 맺힌 토마토가 썩은내를 풍기고 있었다. 이번에도 하슬라는 제 탓인것만 같았다. 아버지가 화가 나서 또 비내리기를 멈춘 것만 같았다.


라온과 하슬라는 말없이 농작물과 잡초를 뜯어내 버렸다. 마른 흙이 날릴 때마다 잔기침이 났지만 대놓고 기침 소리를 낼수는 없었다. 밭의 반도 정리하지 못했는데 버려야 할 것들이 하슬라의 허리까지 쌓였다.


"이제 어느 정도 정리되었으니 들어가 봐. 강물을 퍼 올려 밭에 물을 주는 건 내가 하면 돼."


"내가 도와줄게. 혼자서는 힘들잖아."


"아니야, 언제나 내가 혼자 하던 일이었어. 넌 어머니 도와드리면 돼."


하슬라는 강 가로 내려가 흙 묻은 손을 씻고 옷을 털어내었다. 인간 세상에서는 비가 오지 않으면 이렇구라 하는 것을 처음으로 겪어보았다. 예전 인간 세상에 비를 내려달라고 부탁하던 그 남자아이의 절박함이 바로 이런 것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식당으로 들어가자 어느새 돌아온 매디가 채소를 다듬고 있었다. 하슬라는 얼른 몸을 움직여 그 옆에 웅크리고 앉아서 채소를 들어 올렸다. 누렇게 뜬 잎이 대부분이었지만 매디는 조금이라도 더 쓸만한 놈을 찾으려 손을 부지런히 놀렸다. 하슬라도 그 옆에서 눈치껏 따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집 나와보니 어때? 살만해?"


하슬라는 고개를 저으려다 끄덕였다.


"잘 곳 있고 먹을 수 있으니 그런 생각을 하는 거겠지. 내가 받아주지 않았어도 그럴 수 있었을까? 더 늦기 전에 돌아가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영영 돌아가지 못하게 되는 수가 있어."


매디는 다듬은 채소를 스튜에 넣고 국자로 휘휘 저었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잔해는 하슬라가 빗자루를 가져와 쓸어 담았다.


'영영 돌아가지 못한다면.'


매디의 말이 맞았다. 너무 늦는다면 바론은 하슬라를 받아주지 않을지도 몰랐다. 아니, 바론은 모른 척 그녀를 받아줬을 것이다. 분란을 만들기 싫어하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힐조와 하에라가 과연 그렇게 해주지 않을 것이다. 하슬라는 차라리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하에라 옆에 있는 아란을 보는 게 한데서 잠을 자고 끼니를 거르는 일보다 고통스러웠다.


'아란……."


아란을 생각하면 정원이 떠올랐다. 다시 그곳에 가볼 수 있을까. 자작나무 잎사귀가 바람에 흔들리고 시냇물에 비친 햇살이 부드러웠던 그곳에. 불같은 마음을 잠재워주고 하늘거리는 설렘을 선물해 준 그곳에. 하슬라는 고개를 세차게 젓고는 비질을 마저 하기 시작했다. 모든 기억은 미화되기 마련이다. 과거의 환상에 붙들려 있지 말자. 지금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이곳이고 나를 받아 준 이 사람들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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