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오늘 그릇이 세 개나 깨졌다. 일곱 손가락에나 들까, 여태까지 우리 집에서 깨져 나간 그릇이. 좀처럼 물건을 깨뜨리지 않는 나는 이틀에 걸쳐 줄줄이 깨진 컵, 반찬통 그리고 도자기 찬합이 불안하다.
뭔가 깨진다는 건 재수가 없다는 여항의 주술이 깔려 있다. 믿다 보면 사사건건 의지하게 될까 봐 평소 점을 보지 않는다. 점사를 통해 자기 결정에 응원을 받고 싶다는 친구도 있다만 내 맘으로 결정하고 사는 편을 택하는데, 팔랑귀인 나는 이게 좀 뿌듯하다. 그래서인지 '탈팍' 하더니 산산이 바스러진 유리그릇을 앞에 두고 내 맘대로 해석하기로 한다. 이전과 이별하라고. 이전에 살던 방식을 떠나보내라고. 극한 번아웃 후 다르게 살겠다던 약속은 다 잊히고 자신을 또 땔감 삼아 몸을 혹사했다. 그러다 결근하게 되면 직장에 미안함이 지옥처럼 몰려온다. 나를 태우는 삶을 이젠 탈팍 내려놓고 싶다. 덤덤히 그 파편을 쓸어 담고 버려야지. 깨진 그릇을 한 점 호들갑 없이 그리 대했듯이.
범어사 기와는 층층이 조화롭고 소나무가 간간이 동양화구나... . 몸이 아프니 제사에 집중할 수가 없다. 어머니 돌아가신 지 10년 되는 기제사라고 알아차리곤 깜짝 놀란다. 된장, 간장, 각종 엑기스들. 어머니의 항아리나 저장 용기는 아직도 우리 집에 그대로 있다. 먹기엔 너무 오래되었는데도 끼고 산 이유가 '그리운' 거다. 아들, 며느리, 손자에게 아무 대가 없는 사랑과 정성을 담아 바리바리 보내온 것들이다. 사람의 몸은 없는데 기운은 거기 있다. 어른이 없는 우리 집에 그 손길이 있다고 은연 중 여기고 산 건 아닐지. 중심이 없어 의지하는 습이 있는 얄팍한 내가 말이다.
사실, 간혹 먹기도 했는데 이러다 암 생기겠다 싶은 현실적인 자각이 덜컥 든다. 이젠 보내야지. 10년은 분수령을 만들기에 적합한 시간이다. 추석 때까지 베란다나 창고, 싱크대 깊숙이 자리 잡고 앉은 저들을 보내기로 한다. 하나 둘 나가면서 저들은 이를 것이다. '네 식대로 서 봐'라고.
많이 아팠다. 훌륭한 수업은 놓고 '그냥 수업'하겠다고 했지만 아이들이 의미 없이 기계적으로 듣는 수업은 여전히 용납할 수가 없다. 그 누가 오십 대 평교사의 수업을 알아준다고 이러고 있는지. 비루한 체력과 고집에 서글프다. 그런데 내가 이리 아픈 것은 자랑스러워해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허허로운 자괴감이 '탈팍' 하고 깨어진다.
신념이든 습관이나 물건이든 곁에 두고 기대던 것을 떠나보내는 것이 아무러하지 않고 오히려 신선한 때가 있다. 기댐을 벗어나 오직 나로 선다는 것은 늘 어렵고 두려운 일이지만 살다 보면 '그러하게' 되는 날이 힘들이지 않아도 오는 순간이 있다. 평범한 우리에겐 물론 일면에서겠지만. 어찌하든 이를 두고 '자연'이라 한다지. 그러니 너무 애쓰지 않아도 그리 되어가는 인생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