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흐마니노프를 위하여
주말 동안 그렇게 아프더니. 그래서 연휴 전 이틀을 못 참고 덜컥 휴직을 했다. 이틀만 근무하면 추석 연휴를 쉴 수 있고 좀 더 나을 수 있을 텐데. 내 입장을 더 주장해도 되는데 뭐가 미안해서 장기 휴직을 내었지... . 예측할 수 없는 결근이 되면 직장에 폐를 끼치니까 안정적인 대체 인력이 오도록 장기로 휴직을 내줘야 한다는 것이 급하게 휴직을 결정한 첫 번째 이유다. 왜 나는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지 못하는지. 재밌게 할 수 있는 한 학기 수업 준비도 고생고생 마련했건만 주말의 고통을 겪고는 더는 감당하기 싫다는 굴복이 날 유혹하기도 했다. 자꾸 중간에 멈추고 도망가는 건 아닌가 하는 두려움 역시 어떻게 극복해야 하나.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은 나뿐이다. 생각해 보면 내 맘에 드는 수업 설계가 될 때까지 직장에서 한 시간도 쉬지 않고 준비를 하는 것이 일상이다. 늦은 퇴근은 말할 것도 없고. 의사 선생이 그랬다. "ㅇㅇㅇ병, ㅇㅇ병 등등. 이런 걸 '잘하려는 병'이라고 합니다."
적당한 병가만 낼 것이지, 누가 알아준다고 그리 열심히 일했나, 이런 열정으로 승진을 했다면 벌써 교장이 되고도 남았겠다, 열심히 하다가 아파 드러눕는 거나 쉬엄쉬엄 하면서 일의 질을 챙기는 거나 결국 양과 질 면에서 뭐가 다른가, 생산적인 건 후자다. 얼마나 자주 이런 후회를 할까. 남편 말대로 내 마지막 직장 휴가다 생각하고 동안 힘들었던 나에게 휴식을 주는 것이 맞겠지. 비록 삐그덕거리는 절차였지만.
휴직 첫날 아침이 우울하다.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을 듣는다. 그는 교향곡 1번을 무참히 실패하고 우울증과 신경 쇠약으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3년 동안 겪었다 한다. 이후 이 두 번째 교향곡과 피아노 협주곡 2번이 성공하면서 자신감을 회복했다고 한다. 심리학자들은 작은 성공을 자주 경험하는 것이 자존감 회복에 좋은 방법이라고들 말한다. 그는 물론 큰 성공을 경험했으나 실패로 인한 어려움은 인간이라면 다 똑같이 겪는구나. 나라고 뭐.
내겐 생소해서 그런지 성공한 교향곡이라고 하지만 이 곡 이전 그의 실패-그러고 보니 그 실패라는 것도 '과정'이다-를 더 생각하며 듣게 되는데 이젠 진부하다고 할 문구가 문득 떠오른다.
괜찮아. 쉬어 가도 괜찮아.
쉬어 가는 것이 무슨 죄라고 이러고 있나. 누구에게나 인생은 쉽지 않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인류적인 공감이 때로 어려움을 이겨내는 힘이 되어 준다. 이는 물론 상식적 지혜이기도 하지만 인지 심리학자 김현은 '바운더리(2024)'에서 '내 경험을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사람들의 공통적인 경험이라고 정상화하는 '보편적 인간성' 개념으로 이를 설명하며 마인드셋 매뉴얼 중 하나로 제시한다. 내가 겪는 어려움이 자연스러운 삶의 이치이자 인류의 공통된 경험임을 상기하고 고통이 찾아오는 순간마다 내가 세상 사람들과 연결됨을 느끼라고 한다. 그는 과도한 책임감으로 인한 부작용을 이겨내는 마인드 셋으로 내 감정과 생각을 알아차리고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마음 챙김', 내 고통을 따뜻하고 열린 마음으로 수용하는 '친절함', 마지막으로 위의 '보편적 인간성'을 들었다. 현대인의 정신적 고통에 대한 적확한 매뉴얼을 상황별로 제시해 주는 터라 나는 이 책을 '정신 위기 대응 사전'이라 하곤 한다.
이사 온 후 뒤죽박죽인 책장에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찾았다. 대학 때 읽다 내팽개친 민음사 판. 박웅현의 '여덟 단어(재출간본 2025)'에서 언급된 책은 찾아보고 싶다. 그는 이 책이 백 년은 넘길 것 같다고 했다. 태순이와 아파트 정원에 앉아 책을 읽어 본다. 호사스러운 휴직을 보내리라. 안 그러면 너무 억울하니까.
해 질 녘에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2번을 들었다. 슬프고 거대한 삶의 파도가 결국에는 찬란한 은빛으로 부서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