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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원숭이 삼촌을 생각하며

by 애카이브

어린이를 ‘작은 사람’이라 부르는 글을 읽은 적 있다. 그 표현이 마음에 남았다. 어린이는 단순히 보호하거나 가르쳐야 할 대상이 아니라, 자기만의 우주를 가진 한 명의 사람이다. 아직은 몸이 작을 뿐, 마음과 생각까지 작은 건 아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어린이를 한 명의 ‘작은 사람’으로서 존중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그런데, 제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 글은 어린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원숭이에 대한 글이다. 그런데도 첫 문단에 어린이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은 왜일까. 그건 모니터 앞에 앉은 나에게 다음과 같은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린이가 ‘작은 사람’이라면, 원숭이는 ‘털 난 사람’이 아닐까?

나는 원숭이를 좋아한다. 집에서 같이 살지는 못해도, <혹성 탈출> 같은 영화나 <동물농장>, 원숭이가 나오는 다큐멘터리는 열심히 봤다. 사람 손을 잡고 씩씩하게 걷는 모습이며, 풍부한 감정이 느껴지는 애수 어린 얼굴을 외면할 수 없다. 무엇보다, 그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먼 옛날 운명의 장난이나 진화의 법칙, 생명이 신비 뭐 그런 것이 ‘한 끗’만 달랐더라도, 현대 인류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인간이 아니라 원숭이로 태어났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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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의 원숭이에 대한, 이런 쉽고 자연스러운 호감이 조금 의심되기 시작했다. 나는 왜 사람은 그렇게 가리면서, 원숭이에게는 너그러운가? 어쩌면 원숭이는 내게 무해한, 처음부터 끝까지 무해한 존재이기에 그런 마음이 가능했던 것은 아닐까?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는 복잡하고, 힘들다. 타인의 (복잡한) 맥락과 나의 (복잡한) 맥락이 얽혀 들어가면서 관계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가 살아온 역사와 나의 역사가 충돌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계의 복잡성은 골치 아프고, 때로는 도망치고 싶을 만큼 버겁다. 타인의 맨얼굴을 마주하기란 이토록 어렵다.

그런데 사람과 원숭이의 관계는 다르다. 원숭이는 나의 실존에 어떤 위협도 가하지 못한다. 우리는 원숭이 마음의 복잡성을 맞닥뜨릴 필요가 없다. 스마트폰 화면이나 스크린 속, 혹은 동물원의 철창 안쪽에 존재하는 무해한 사람, 현대인에게 원숭이란 그런 존재가 아닐까. 그 어떤 동물보다 인간과 닮아서 친밀감을 붙일 대상은 되지만, 100%의 인간은 아니어서 만만한 것. 내가 보고 싶은 면만 보고, 주고 싶은 마음만 줘도 괜찮은 사람. 이런 일방적 관계.

그래서인지 원숭이 인형은 대부분 웃는 표정을 짓고 있거나 ‘웃상’이다. 히나쿠우의 쿠숭이, 이케아의 융엘스코그, 세키구치의 몬치치 모두 마찬가지다. 그런데 원숭이의 진정한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그들의 웃는 표정만 들여다봐서는 안 되지 않을까. 원숭이의 슬픔과 고통과 분노를 외면하지 않고, 그들의 원숭이다움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동등한 존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배워야 한다. 나는 원숭이를 좋아하지만, 원숭이를 너무 모른다. 내가 원숭이 삼촌을 꿈꾸는 이유다. 명절이면 과일 바구니를 들고 그의 집에 찾아가고 싶다. 원숭이로서 사는 일의 어려움을 듣고, 원숭이의 삶에 대해 한수 배우고 싶다. 그의 털 속에 사는 이를 떼어주면서. 원숭이란 그저 매끈하고 무해한 존재가 아니라, 북슬북슬한 털을 가진 사람이자 우리의 먼 친척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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