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중과 상연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상연을 욕하며 은중을 응원했다.
물론, 나도 은중을 응원했다. 하지만 상연을 욕할 수는 없었다.
상연의 행동에서 어렸던 내가 보였기 때문일까.
은중과 상연을 보는 내내 마음 한 켠에 머무르던 너.
너를 감히 ‘나의 은중’이라 칭하고자 한다.
우리의 관계는 태어나기 전부터 정해져 있었다. 엄마부터 시작된 친구란 관계는 같은 해에 딸을 낳음으로써 우리에게도 이어졌다. 두 모녀가 서로의 친구였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성향이 비슷한 그들과 다르게 우린 타고나길 달랐다.
그래서 너를 참 많이도 좋아했고 나를 참 많이도 미워했다.
너와 나의 다름이 발현되는 수많은 순간 속, 내 눈은 나의 못난 부분들만을 찾아냈다.
유난히 취향이랄 게 없던 나와 달리 너는 호불호가 명확한 아이였다. 좋고 싫음이, 예와 아니오가 명확했기에 너는 모든 행동 앞에 망설임이 없었다. 나는 그런 너의 행동력과 자신감이 부러웠다. 그리고 답 하나를 고르는데도 수십 분을 고민하는 내가 바보 같았다.
너와 놀고 나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왜 나는 너처럼 못할까”라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아무도 내가 못났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내가 나를 몰아붙이며 미워했다. 너와 노는 시간을 즐기기만 하면 좋았을 걸, 난 너와 다른 나를 미워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차라리 너와 함께 밥을 먹거나 쇼핑을 할 때면 너의 답을 따라갔다. 결정을 진작에 끝낸 네 앞에서 나 혼자 메뉴판을 들고 고민하는 그 시간 동안 나를 미워하는 게 힘들었기에.
그 시절, 너를 따라 하기 바빴던 내게 너는 언니 같았다. 항상 혼자서 뭐든 해내고 이 세상에 어려움이란 없는 것 같은, 그런 언니.
그랬던 네가 큰 파도를 만났다. 그 파도에 너는 심하게 흔들렸고 그걸 곁에서 지켜보는 나는 무서웠다. 너는 항상 나보다 앞서 나가는 잘난 아이라 생각했기에 처음 마주한 너의 무너짐은 내게도 공포였다.
나의 서투른 위로에 무너질까 함부로 말을 못 건네던 사이, 매일매일 작아지던 너는 어느샌가 너의 단점만을 보려 애쓰고 있었다. 더 늦으면 영영 말을 전할 수가 없을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나를 미워하면서까지 좋아했던 너의 모습들을 솔직하게 전했다.
이어진 너의 대답은 내 예상과는 달랐다. “나는 너를 부러워했어”
나의 은중은 나를 부러워했다고 말했다.
호불호가 명확해 싫은 상황엔 만족하지 못하는 자신에 비해 어느 상황이든 잘 적응하며 여러 사람과 어울리는 내가 부러웠다고 말했다. 내가 부러워한 은중의 뚜렷한 주관은 나의 적응력에 가려져 오히려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결국 우리는 서로를 부러워만 하며 상대의 장점에 가려진 자신의 장점을 보지 못한 채 속에서부터 곪아가고 있었다. 자신을 미워하고 있었다.
다행히 늦지 않게 전한 진심에 나의 은중은 점점 자신의 장점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 주고받은 진심 속에서 나도 나를 미워하지 않게 되었다. 모든 사람은 입체적으로 태어나기에 빛을 받으면 그림자가 생긴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오로지 어둡게 물든 그림자에만 몰두하며 아파하길 반복했지만 이제는 안다. 그 그림자는 사실 나의 형태가 존재하기에 생긴다는 것을, 결국 내 장점이 존재하기에 상대적으로 부족한 부분도 생긴다는 것을.
이제는 서로를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입장으로써 과거의 은중과 상연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은중은 상연이 될 수 없다. 상연도 은중이 될 수 없다. 다름을 인정했기에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서로의 빛을 바라봐 줄 수 있었으니. 하지만 그보다 먼저, 자신을 사랑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야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 시간을 보낼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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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