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와 올리버 색스
연말이라고 읽다 만 책들 중 한권은 제대로 끝내보고자 그나마 가장 최근에 읽다만 올리버 색스의 책을 펼쳤다. 다행히 몇 페이지 남지 않아 금방 끝낼 수 있었다. 오랜만에 책을 읽는다는 감각이 좋았는지 곧이어 다른 책을 폈다. 그러나 이상한 끌림에 이끌려 여전히 읽다만 책들 중에서가 아닌, 구지 새 책을 사서 읽었다. 책의 제목은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 언젠가 몇년 전에 온라인 서점 광고, 아니면 책 리뷰 기사에서 본 책이었다. 책의 제목이 재밌다고 생각되어 어떤 책인지 궁금해 살짝 훑어만 본 책이었다. 언젠가 한번 읽어보고 싶다곤 생각하였지만 그 언젠가가 그 때는 아니었기에 그렇게 스쳤고 기억에서도 금방 지워졌다. 그 눈에 띄는 책 제목을 다시 만난건 최근이었다. 같은 제목으로 한석규, 김서형 주연의 드라마가 만들어졌다길래 나는 금방 '아, 그 때 그 책이 드라마화 되었구나! 어떤 책이었더라?' 하고 책 이름을 검색했다. 드라마 예고편도 봤다. 책에 나온 요리들이 영상 속에 정갈하게 등장하는걸 보고 있자니 드라마도 보고 책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언젠가'가 '지금 당장'이 되는 순간이었다.
요리의 문외한인 남편이 대장암 말기 환자인 아내를 먹이기 위해 요리를 만드는 이야기. 자꾸 잊어버리는 레시피들을 기억하기 위해 쓰기 시작한 글이라고 했다. 책에는 작가 그 자신도 먹이고 다른 식구들도 먹이는 이야기가 더 담겨있다. 또 책에는 아내의 임종이나 장례식 등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고 글도 시간 순서대로 엮인 것도 아니어서 드믄드믄 아내가 글에 등장하는 것으로 대략 상황이 어떠한지 짐작만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글이 더 담담하고 담백하게 느껴졌다. 다른 한편으론 듬성듬성 엮인 이야기들 사이에 빠져나간 이야기들이 무엇인지 알기에 글쓴이의 슬픔이 마치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멍처럼 먹먹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드라마를 먼저 보기 시작했지만 어느날은 책을 더 많이 읽는 바람에 드라마와 책의 내용이 엎치락 뒤치락 거리며 흘러갔다. 어떤 날은 책의 문장들을 드라마에서 다시 만나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책에 나오지 않는 내용들을 드라마에서 보기도 했다. 그러면서 새삼 책과 드라마가 이렇게나 다른 매체라는걸 깨닫기도 했다.
개인적인 취향으로 드라마의 마지막이 너무 설명적으로 느껴져 책이 가진, 그리고 드라마 또한 초반에 가지고 있던 담담하고 담백한 기조를 잃어버린 것 같아 아쉽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 빼고는 책과 드라마 둘다 나를 다시 블로그에 글을 쓰게 하고, 하고 싶은 가급적 건강한 요리를 찾아 해보게 할만큼 열정적이게 만들었다.
한 그릇의 요리가 단순히 맛이라는 감각 뿐만 아니라 기억과 추억과도 연관되어 있듯이 이 책과 드라마는 잠시 잊고 있던 일들을 생각나게 했다. 아빠는 암이었고 엄마는 집과 병원을 오가며 삼남매를 돌봤다. 그 와중에 틈틈이 하던 부업도 계속 하셨던 지라 집에서 엄마를 볼 수 없는 날이 더 많았지만 엄마가 해 놓고 간 음식들은 기억이 난다. 밥만 해서 먹으면 간단하게 한끼 식사가 될 수 있는 그런 요리들이었다. 아빠가 병원에서 돌아오고난 뒤 새로 생기거나 바뀐 반찬들도 기억난다. 아빠는 모든 음식이 짜다며 음식 투정을 했고 우리집 반찬들은 날이 갈 수록 더 싱거워졌다. 그리고 식탁 옆 작은 선반에는 항암에 좋은 음식관련 책들이 빼곡히 쌓여갔다.
전이 소견이 있어 아빠는 항암치료 외에도 방사선 치료도 받았다. 몇번의 입원과 퇴원을 반복한 뒤 다행히 아빠의 상태는 조금씩 호전되었고 지금은 완치판정을 받았다. 이제는 조금 짠 음식도, 고기도, 기분이 좋으면 몇 잔의 술도 걸칠만큼 건강해지셨지만 그때 바뀐 엄마의 요리스타일은 아직도 여전하다. 여전히 싱겁고 푸성귀 넘치며 조미료까지 건강한 엄마의 밥상. 밥만 해서 먹으면 금방 든든한 한끼가 되는 푸짐한 한가지 요리들. 엄마의 영향인지 나 또한 되도록 그릇 한 두개를 넘지 않는 요리들을 해서 먹는다. 싱겁고, 항상 각종 야채가 들어가며 비싸고 다양한 식재료보다 건강한 조미료에 돈을 더 쓴 나의 밥상. 이런 밥상의 연대기는 언제, 누구랑 해도 즐겁게 할 수 있다. 작가의 이야기가 담담하고 슬프기만 한게 아니라 어쩐지 즐겁고 신나는 느낌이 들기도 하는건 아마 그 때문이겠지. 작가의 밥상에 자주 등장하는 쥐똥고추의 역할이 이런 역할이려나? 괜시리 코 끝이 매워지는 기분이다.
소름이 돋았던 건 그 뿐만이 아니었다. 책의 저자는 올리버 색스의 첫 책, 편두통을 한국어로 번역한 번역자이기도 하다. 또 그의 아내가 운영했던 출판사는 올리버 색스의 책을 독점출판하였다. 그러니까 내가 그의 책,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를 읽기 전 읽었던 올리버 색스의 책은 그의 아내가 운영했던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었던 것이다! 이건 책을 다 읽고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다. 얼마나 놀랐던지! 마치 하늘에 있는 올리버 색스가 그의 첫 한국 책 역자와 출판사 대표의 이야기를 읽게 만든 것 같단 착각마저 들게했다.
사람은 사람을 연결시키고 이야기는 꼬리의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올리버 색스에서 그의 한국 책을 출간하는 출판사 대표와 번역자의 이야기로 그리고 암환자와 음식에 대한 이야기, 아빠와 아빠가 아팠던 내 어린시절의 이야기까지. 그러던 와중 나는 처음으로 실습에서 같이 작업하던 말기 암환자 한 분을 호스피스 병동으로 보냈다.
아, 어쩜. 나는 이런 일을 해야 할지도 몰라. 암환자들을 위한 일! 어쩜 올해의 테마가 될지도 혹은 인생의 테마가 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이건 모두 연말에 다시 읽은 올리버 색스의 책에서 시작 된걸까 아니면 암에 걸린 아빠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된걸까? 운명론을 조금 더 믿으면서 시작하는 2023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