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미술치료사로 일하기
독일에는 환자복이라는 것이 없다. 정신과가 아닌 일반 입원병동에 가도 환자들은 수술복이나 따로 챙겨온 환자복이 아닌 이상 사복을 입는다. 병원이란 곳은 어차피 환자들에게 낯선 환경일 테니 병원에서 제공하는 낯선 옷을 입는 것 보다 환자들이 평소에 입는 옷을 입는 것이 환자들의 정서에 더 좋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정신과 병동에서는 일반 정신과 병동이냐 폐쇄병동이냐에 상관없이 모두 사복을 입으며 이것은 병동에서 일하는 의사나 상담사, 정신보건 간호사들에게도 해당한다. 그래서 일하는 사람들은 꼭 이름표를 해야 하는데 이름표 없이는 누가 환자인지 의료인인지 구분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린이 청소년 정신병원 또한 마찬가지로 환자복이 없다.
어린이 청소년 정신병원에 일하러 간 첫날이었다. 나는 병원 립셉션 앞에서 나를 인솔해줄 담당자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앞을 지나가던 많은 직원분들이 친절하면서도 약간 걱정어린 표정과 말투로 무슨 일로 병원에 왔고 무엇을 도와줄 수 있는지 묻는바람에 일일이 다 대답하느랴 진땀을 뺀적도 있다. 아마 내가 이름표도 없는데다 동양인이라 아무래도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워 환자로 착각한 것이었다.
또 하나 재미있는 점은 높임말이다.
독일어에는 높임말이 있는데 대게 병원에서 성인 환자들에게는 높임말을 쓴다. 당연한 말 같지만서도 독일어의 높임말은 한국의 높임말과는 조금 다르다. 한국에서는 나이가 많거나 직급이 높은 사람 또는 환자나 고객같은 서비스의 대상에게 높임말을 쓴다. 내가 어릴 적엔 모르는 사람에겐 일단 무조건 높임말을 쓰고 어느정도 통성명을 한 후에 말을 놓아도 되는지 물어보라 배웠다. 물론 반 친구나 또래친구들에겐 스스럼 없이 반말을 쓰며 통성명을 했지만 어른이 되고부터는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때도 있으니 실례를 범하지 않기 위해 초면엔 나이차가 안나보여도 일단 존댓말을 쓴다. 그리고 이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겠지만 나이차가 있어보이는 사람에겐 무조건 높임말을 쓴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에서는 사람과 처음 만나 알아갈때 가장먼저 하는 질문이 아무래도 이름 다음 나이일까 싶다. 그래야 호칭뿐만 아니라 상호간 어떤 언어를 사용할지 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일의 높임말은 나이나 직급의 차이 보다는 사람간의 거리를 뜻한다. 그래서 일단 같이 일하는 '동료'면 평등한 관계이기 때문에 의사든 심리상담사든 간호사든 직급이나 나이에 상관없이 모두 반말(duzen)을 하며 대신 환자들에게는 존댓말(siezen)을 쓴다. 이건 의료진과 환자사이의 거리를 뜻하며 '거리를 지키고 서로 존중하며 대한다'는 의미에 가깝다. 그래서 내 또래 환자에겐 존대말(siezen)을 쓰고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멘토 미술치료사 분이나 의사분들께는 오히려 반말(duzen)을 쓰는, 한국인인 나에게는 조금 기이한 상황이 벌어진다. (물론 한국이라도 또래 환자에게 반말을 쓰진 않겠지만...)
독일어에서는 존댓말(siezen)과 반말(duzen)을 할 때, 주어가 변하며 그에 따른 동사변형이 이뤄지기 때문에 특히 주의해야 하는데 처음엔 이게 정말 어려웠다. 특히 실습생으로 나보다 나이가 많은 미술치료사분에게 너(du)라고 말하는게 망설여져 나도 모르게 존칭어를 쓰며 높여 부르게 된다거나 내적친밀이 쌓인 내 또래 환자에게 나도 모르게 반말로 너(du)라고 말하게 된 적도 몇번 있었다.
그러나 어린이 청소년 병원에선 조금 다르다.
법적으론 이미 성인인 18에서 22살 정도의 젊은 어른(Junge Erwachsene)환자들을 제외하곤 환자에게 반말(duzen)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환자는 의료진이나 치료사들에게 존댓말을 쓴다. 어린이 환자들의 경우 병원마다 다른데 서로 반말을 하되 환자들이 의료진이나 치료사들을 지칭할땐 존칭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내가 독일어를 배울 때는 독일어의 존댓말은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거리의 차이이므로 거리를 두고 예의를 갖춰야 하는 은행이나 관공서 등 주로 공적인 공간에서 사용하며 나이에 상관없이 친구나 학우, 직장동료 등 가깝거나 평등한 사이에서는 무조건 반말을 써야 한다 배웠다. 특히 존대를 쓰면 상호간 존대를 사용해야 하며 누구는 반말 누구는 존대를 쓰는 일이 없다 들었다. 그래서인지 어린이, 청소년 정신병원에서 직원들이 반말, 환자들은 존대를 쓰는 것이 처음엔 매우 어색하게 느껴졌다. 나중에 듣기론 이런 호칭문제는 병원장의 재량이기도 해서 보통 독일 학교에서도 이런식으로 선생님과 교직원은 반말, 학생들은 존대를 쓰지만 선생님의 재량이기도 해서 상호 동의하에 서로 이름을 부르고 반말로 얘기하자 하는 선생님들도 있다고 한다. 독일에서 학교 다닐 적을 생각해보면 대학에서는 교수나 강사 그리고 학생들 사이 서로 존댓말을 사용하긴 하지만 일부 강사 선생님들 중엔 동의하에 서로 반말을 하고 이름을 부르자 하는 분들도 있었다.
어찌됐든 이건 어린이, 청소년 혹은 아직 대학이나 대학원에 다니는 학생들에 한해서고 성인이며 병원이라는 포멀한 공간에서 만난다면 상호 존대를 써야한다.
사실 은행에 가거나 관공서에 가서 업무를 보지 않는 이상 존댓말을 할 일이 거의 없는 나는 이번 인턴쉽을 시작하고도 몇번 실수를 했다. 지나가는 나를 붙잡고 친근하게 말을 붙이던 환자를 직원으로 착각해 반말을 하기도 하고 환자분 또한 내게 몇번 반말로 얘기했다가 내 멘토분에게 한마디 듣기도 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성인 환자와 치료사의 관계에선 서로 어느정도의 거리를 지키는 일이 라포형성을 하는 과정에서 중요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에 반해 어린이 환자들 같은 경우는 아무래도 치료사가 환자와의 라포형성에서 신뢰할 수 있는 어른의 역활을 해야 하기 때문에 오히려 반말로 가까운 사이임을 자처하는게 더 좋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