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옆구리에서 태어난 일국의 왕자 아기 부처는 일곱 발짝인가를 걸은 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외쳤다고 한다.
자식을 낳은 뒤에는 '라훌라(장애물)'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는 구도를 위해 홀연히 세상을 등졌다는 이야기까지. 기억나는 것은 이 정도이긴 하다.
그에 비해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는 인간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구도자 싯다르타의 여정을 그리고 있다.
소설이 한 인간을 집중하여 조망할 때 색깔만 다를 뿐이지 영웅서사의 구도를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은 늘 반복되는 일이긴 하지만, 우선 위와 같은 판타지스러운 영웅서사가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 싯다르타는 사문을 지나 기생에게로 갔고, 장사를 하며 돈 맛도 보았다. 그는 다시 구도의 길 위에 이르렀으나 아들에게 절절매며 또다시 길을 잃는다. 방황의 시간들은 싯다르타에게 구도의 완성으로 이끄는 치트키였다.
그에게 구도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가르침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깨우쳐야만 하는 지혜였다. 그는 그 무엇에도 거스르지 않는 마음으로 경험하고 언어와 사물들을 통과해 나간다. 고결한 사문인 고타마를 대할 때나 뱃사공을 대할 때나 한결 같이 고개 숙인다.
사유가 확장되지 못하는 것은 인간이 육체에 갇힌 존재여서가 아닐까. 인간은 자신의 육체만큼 경험할 수 있고, 사유할 수 있는 작은 존재가 아닐까.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타자의 세계에 의지해야 하는 것이다.
싯다르타는 온몸과 마음을 기울여 바깥으로, 타자의 세계와 사물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는 세상을 등진 채 자신의 내면에만 집중하는 사문의 방식과는 정반대의 길이었다.
싯다르타는 자신에게서 벗어나 외부 세계와 합일되고자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세계의 본질을 발견하는 것으로 완성에 이른다. 자신 밖에서 완전한 자기를 발견한 것이다. 낯선 것 앞에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철벽부터 치고 보는 나의 여린 세계에 싯다르타의 거스르지 않는 마음은 거인의 그것이었다.
"싯다르타는 귀를 기울였다. 그는 이제 온전히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되었고, 듣는 일에 완전히 몰입하여 완전히 마음을 비운 상태, 완전히 빨아들이는 상태가 되었다. 이제야 귀 기울여 듣는 법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략)
이렇게 싯다르타가 수천 가지 소리를 내는 강의 노래에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자, 또 고통의 소리와 웃음소리를 분리해 듣지 않고 특정한 소리에 자기 영혼을 얽매거나 자신의 자아와 더불어 거기에 빠져들지 않은 채, 모든 소리를 듣고 그 전체, 그 단일성에 귀를 기울이자, 수천 가지 소리가 어우러진 위대한 노래는 단 하나의 단어가 되었다. 바로 완성을 뜻하는 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