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의 비극, 파우스트
파우스트 | 전영애 옮김 | 도서출판 길
"한데 왜 강물은 이리 금방 마르며 우리는 또다시 목마름 속에 누웠는가? (파우스트 1, 185쪽)
죽음을 앞둔 인간에게 회한은 공포 그 자체다. 죽어도 죽을 수 없고, 무덤 안에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 같은 공포. 회한은 결국 자신이 더 오래 살아야만 한다는 감각을 일깨우고 죽음을, 신의 부름을 거역하게 한다.
(확인할 수는 없지만 IQ가 200 이상이었다 카더라는) 괴테는 죽음을 앞둔 인간의 회한을 판타지로 풀어버린다. 그렇게 해서 파우스트는 시인이자 배우가 되어 자신의 지난날 속으로 회귀 여행을 떠난다. (이러한 현대적인 감각을 괴테는 대체 어떻게 갖추고 있었던 것일까?)
명분은 삶이 결여된 채 지식으로만 가득한 노학자의 공허. 메피스토펠레스를 통해 신의 허락도 받아내고, 쓰는 김에 더 쓴다고 어차피 회귀할 거면 젊어지는 것도 좋겠다. 지극히 인간적인 욕망으로 범벅된 파우스트는 젊은이가 되고 가장 먼저 연애부터 시작한다.
저는 힘의 한 부분입니다. 늘 악을 원하면서도 늘 선을 이루고 마는 저 힘의 일부죠. (...) 저는, 태초에는 전부였던 부분의 한 부분, 빛을 낳았던 암흑의 일부죠. (파우스트 1, 199-200쪽)
눈에 띄는 것은 메피스토펠레스이다. 그의 언어는 파우스트의 그것보다 선명하다. (파우스트에게서는 어딘지 돈키호테의 허당 스멜이 느껴집니다!)
그는 파우스트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인생의 희로애락을 맛보게 해 준다. 메피스토펠레스는 신과도 주저 없이 면대하며, '암흑의 일부'이기에 '영원한 공허를 사랑'한다. 메페스토펠레스에게는 어떤 두려움도 없다.
사랑과 갖가지 사회생활을 경험하며 회귀 여행을 마친 파우스트는 구원을 이루며 천상으로 올라가는데, 파우스트의 구원은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파우스트가 뭘 해서 구원을 얻은 것이냐는 말이다.
예정론적 구원론을 택한다면 신이 처음부터 파우스트를 구원할 계획이었음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신은 처음부터 "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면서 "어두운 충동에 사로잡힌 선한 인간은 바른 길을 잘 의식하고 있다"는 모순적인 말로 파우스트를 감쌌다.
재미있는 것은 이 말들이 진짜 신의 말이 아니라 괴테 자신이 쓴 말이라는 것이다.
<파우스트>라는 비극 안에서 온갖 역할을 다 하며 이런 말 저런 말들을 늘어놓지만 결국 이 비극은 괴테 자신의 욕망이 듬뿍 담긴 희곡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남몰래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글에서 느껴지는 각 잡힌 비범함에도 불구하고 귀여웠던 것이다.
지금은 이렇게 웃으며 글을 쓰고 있지만 사실 쉽지 않은 작품이었다. 괴테의 천재성에 놀랐을 뿐 <파우스트>라는 거대한 작품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해했는지 나는 확신이 없다.
시간이 없지 않았는데, 폭풍 속에서 말을 타고 달리는 사람처럼 초조한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 비범함과 아름다움이 없었더라면 이 책을 끝까지 읽지 못했을 것 같다. 10년쯤 후에 한번 더 읽고 싶은 작품이다. 그전까지 그리스 로마 신화 공부를 좀 해두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