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언론이 주는 부정적인 영향력을 건조한 문체로 재구성하고 있다. 용의자 괴텐을 붙잡지 못한 경찰과 검찰은 그를 도주시킨 카타리나 블룸을 언론에 적극적으로 노출시킨다. 이 과정에서 진실은 사라지며 사실 또한 왜곡된다. 언론은 카타리나 블룸을 마땅히 혐오해도 되는 대상으로 만들어버린다.
전문성을 갖춘 가정관리사로 일하며 성실하게 살아온 카타리나 불룸은 '빨갱이 창녀'로 요약되는 이미지로 소비되며 대중의 공분을 산다. 언론은 판매부수를 올리고, 경찰과 검찰은 무능을 감추고, 대중은 지루한 일상에 활력을 얻는다. 개중에는 익명성 속에서 카타리나를 비난하는 것이 사회적 정의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소설 속 언론의 논조가 어땠을지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소설 속 언론의 상황은 지금의 그것과도 너무나 닮아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언론은 이슈를 이슈로, 기사를 기사로 밀어내며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의혹인지 정확히 구분하지 않는 방식으로 쓴 기사를 제공한다. 기자들이 생산하는 기사만으로는 사실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자극적인 기사로 도배된 언론은 찌라시로 전락했다.
유시민 작가는 레거시 미디어의 시대가 끝났음을 말한다. 그것은 언론이 노출되는 통로가 달라진, 환경이 변화한 영향도 있지만, 기존의 레거시 미디어가 개혁을 시도할 수 없을 정도로 변질되었다고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진실은커녕 사실조차 사라진 세계에 살고 있다면, 내가 하는 생각에 대한 '정치적 올바름'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중요한 것은, 이 이야기에는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라는 제목뿐만 아니라,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라는 부제도 있다는 것이다. 헤드라인의 폭력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그저 조금밖에 알지 못한다. 신문들이 정말 금수 같은 그들의 '무지함'으로 무엇을 야기할 수 있는지 한 번쯤 연구해 보는 것은 범죄학의 과제일 것이다." (161쪽)
문제는 '무지함'인 것이다. 신문들의 무지함은 의도적인 무지함, 즉 교활한 무지함이고, 이들의 장단에 부화뇌동하는 대중이야말로 무지하고 또 무지하다. 그들은 카타리나 블룸의 빨갱이 기질과 창녀다움을 욕할 뿐 '헤드라인의 폭력'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 모르는 것은 언론이나 부화뇌동하는 대중이나 마찬가지이다.
두렵지 않은가. 사실과 질문이 사라진 세계가. 무책임하게 주입된 생각들이 나의 말과 행동을 규정하고, 그것을 나의 고유한 생각이며 심지어 신념이라고 믿어버리는 무지가 말이다.
언론이 언론의 역할을 다하지 못할 때, 개인들은 스스로 의심하고 질문해야 한다. 내 생각의 근거를 확인해야 한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상상력을 작동시켜 언론을 검증할 수 있을 때 "사람이 살 만한 나라에서 살 만한 언어를 찾는 일(166쪽)"이 시작될 것이라고 감히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