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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책의 향기

#책14.『이방인』

알베르 까뮈

by 방수미

오늘, 엄마가 죽었다. 어쩌면 어제, 잘 모르겠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 한 통을 받았다. "모친 사망, 내일 장례식. 근조."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알수 없다. 아마 어제였으리라.


까뮈의 『이방인』은 이렇게 시작한다. 3년간 양로원에 계신 엄마가 돌아가셨고, 뫼르소는 거의 1년을 엄마를 찾아가지 않았다. 날씨도 뜨거웠고, 차도 불편하고, 일요일을 포기할 수 없고, 무엇보다 엄마가 뫼르소를 볼 때마다 운 것도 불편했다. 엄마의 장례식에 참석한 뫼르소는 울지도 않고, 졸기도 하며, 커피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며 ‘뫼르소 부인의 장례식’에 참석한 아무나처럼 그렇게 장례식을 치르고 온다. 돌아온 다음날 날이 뜨거워 바다에 갔다가 예전에 알고 지낸 마리를 만나 (마리가 보고싶어한) 코메디 영화도 보고 같이 잠도 잔다. 주말이면 마리와 함께 보낸다. 어느날 아랫층에 사는 레몽이 애인을 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뫼르소는 레몽의 애인이 바람을 폈다는 진술을 한다. 그저 레몽말만 믿었고, 진실은 뫼르소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친해진 레몽과 뫼르소와 마리는 레몽의 친구 별장이 있는 해변에 갔고, 그곳에서 레몽 애인의 오빠 무리와 부딪혔다. 뫼로스는 그들에게 총을 쏘려는 레몽을 말리고 돌아왔지만, 여자들의 비명과 태양을 피해 찾은 작은 샘에서 레몽 애인의 오빠와 마주치자 그를 총으로 죽인다. 그래서 그는 재판에 넘겨졌고, 아랍인을 죽인 프랑스인이라 모두들 크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뫼르소가 하나님에 대한 예찬을 거부하자 상황은 바뀐다. 검사는 아랍인 살인사건임이 명백함에도 아랍인을 증인으로 세우지 않고, 뫼르소가 엄마의 장례식에서 성의를 보이지 않은 것을 물고 늘어지며 양로원 사람들을 증인으로 세운다. 결국 뫼르소는 사형 판결을 받고, 마지막에 찾아온 가톨릭 사제에게 강하게 반항하며 내일 있을 처형식을 기다리며 『이방인』은 끝난다.


이야기는 짧고 간단하다. 하지만, 왜 알베르 까뮈는 '뫼르소'를 만들고 죽였을까? 다른 사람들은 이름과 성이 있지만, 뫼르소는 이름이 없다. 그냥 '뫼르소씨'이다. 그리고 뫼르소가 죽인 아랍인과 레몽의 애인도 이름이 없다. 그들은 그저 아랍인이고, 무어인이다. 여기에서 나의 생각은 시작되었다.

알베르 까뮈가 『이방인』에서 말하고 싶은 부조리는 무엇일까. 나는 인간 뫼르소가 아닌 알제리 사회에서 부조리를 찾았다. 까뮈가 추구하는 작품세계를 봤을 때 까뮈는 보편적 정의를 실현하고자 했다. 까뮈의 정의는 인간이 부조리를 반항하여 극복하고 사랑하라라는 세 개의 주제로 요약되며, 각각의 주제는 소설·희곡·에세이로 형상화된다. 또한 시사평론을 꾸준히 쓰며 동시대의 문제에 대한 의견을 끊임없이 제기했다. 까뮈가 알제리를 떠나 파리에 왔을 때 파리는 독일 나치의 지배(1940-1944)를 받고 있을 때였다. 그는 타민족의 지배를 받게 된 프랑스가 역설적으로 알제리를 강압적으로 지배하는 프랑스의 이중성을 『이방인』을 통해 고발했다.


*무어인과 알제리

무어인은 원래는 중세 유럽에서 이베리아에 거주하던 무슬림을 의미하였으나 이슬람이 스페인에서 쫓겨난 이후에는 북아프리카에 정착한 무슬림을 말한다. 대체로 수백 년 동안 이어진 아랍인과 베르베르인의 혼혈 후손이다. Moor라는 말은 그리스어 Mauros에서 나왔고, ‘피부가 어두운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아랍인은 아라비아어를 모국어로 쓰는 서남아시아 사람들을 말한다. 예를 들어 이란과 튀르키예는 지리적 위치가 비슷하고 이슬람을 같이 믿지만, 민족과 언어가 다르기에 아랍인이라 부르지 않는다.) 까뮈는 『이방인』에서 여자들은 무어인, 남자들은 아랍인으로 구분하여 사용하였다. 레몽의 정부는 무어인이지만, 그 정부의 오빠는 아랍인으로 소개했다.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았던 알제리는 1830년부터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고, 1848년부터는 본토의 일부로 합병되었다. 한마디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프랑스의 하나의 도시 개념이다. 이 알제리의 기득권을 ‘피에 누아르’(알제리 태생의 프랑스인)가 차지했다. 알제리의 다수를 구성하던 무어인과 베르베르인들은 시민권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제약과 핍박을 받았다. (일제 강점기의 한반도와 비슷) 당시 프랑스는 독일 나치의 기구인 프랑스군정청이 지배하였으니 거의 국가는 멸망했고 영토는 치욕스러운 식민 지배를 받았다. 그럼에도 프랑스는 1942년부터 전보다 더 강압적으로 알제리를 지배하였다. 이런 사회적 부조리의 상황 속에서 까뮈는 『이방인』을 썼고 2년 후에 출판했다. 까뮈의 눈에는 프랑스의 부조리가 선명하게 보였으리라. 그리고 부조리와 차별에 무심한 프랑스의 철학자들도. 그런 속에서 이러나저러나 상관없는 무심한 뫼르소가 탄생했다. (세계 2차대전 이후 여러 나라의 식민지들이 해체되는 과정에도 프랑스는 알제리를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1954년부터 알제리 민족해방전선과 프랑스 간에 전쟁이 벌어져 1962년에야 민족해방전선이 승리하여 자주국으로 독립했다.)


*피에 누아르와 프랑스

『이방인』에서 레몽은 무어인 정부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그녀의 오빠를 하찮게 여기며 싸운다. 포주인 레몽은 당당하다. 뫼르소는 이러나저러나 상관없는 태도로 레몽의 증인이 되어 레몽이 폭력 사건에서 유유히 빠져나오게 한다. 뫼르소가 내려다본 일요일 오후의 거리는 피에 누아르의 즐거움으로 가득 찼다. 경기를 보고 영화를 보고 가족 나들이를 한다. 뫼르소와 마리도 주말이면 바다에서 해수욕을 즐긴다. 그들의 옷차림은 단정하고 흰색, 파란색 등 산뜻하다. 그에 반해 뫼르소가 죽인 무어인은 기름때가 묻은 작업복을 입고 있다고 두 번이나 소개됐다. 뫼르소가 받은 11개월의 예심에서도 그는 판사실의 안락의자에 앉아 편하게 재판을 준비했고, 막상 감옥에서 그는 무어인 속에 몇 안 되는 백인 죄수였다. 까뮈는 이렇듯『이방인』의 행간에서 지배계급인 피에 누아르와 피지배계급인 무어인의 차별을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피에 누아르인 뫼르소가 무어인을 죽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사건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들은 ‘아주 간단한 사건’이라 말하고 ‘같은 세계 사람들끼리 있어 모두가 행복한 클럽에서처럼’ 재판을 진행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예찬하며, 뫼르소에게 하나님을 강요한다. 그렇게 눈물 나게 피에 누아르의 무죄를 위해 노력한다. 까뮈는 뫼르소에게 사형을 선고함으로써 그들 모두에게 죄가 있음을 선포한다. 피에 누아르로서 무어인들 위에 군림하며 특권을 누린 알제리 사회가 가진 부조리에 까뮈는 뫼르소를 제물로 바친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상관없는 태도로 일관하던 뫼르소는 평소의 무심함을 버리고 부속 사제에게 분노를 쏟아내며 반항한다. 부속 사제는 뫼르소를 위로하는 척하며 하나님만 강요한다. 『이방인』에서 처음으로 부조리에 맞서 고함을 지르고 부속 사제를 몰아세웠다. 그리고 처음 쏟아낸 반항으로 인해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다정한 무관심에 가슴을 열었다’라고 말한다. 이 부분이 까뮈가 부조리한 세계에 대한 방법으로 반항을 소개한 것이고, 또한 알제리와 프랑스의 부조리와 카톨릭의 위선으로 까뮈의 가슴을 누르던 돌덩이가 내려가는 부분이려니 싶다. 그리고 ‘모쪼록 많은 구경꾼이 모여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기를 희망하는 것만이 이제 내게 남은 일이었다’라며 『이방인』을 끝맺는다.


*시시포스 신화

까뮈는 『시시포스 신화』에서 자살을 자주 언급한다. ‘현재라는 이 지옥’이 바로 부조리이고 부조리를 끝낼 수 있는 개인적인 방법이 바로 (육체적)(철학적) 자살이다. 하지만, 끝내 ‘나는 자살을 거부한다’라며 반항한다. 반항은 존재에 의미를 둔 각성이다. 이렇듯 까뮈는 20세기 초반 프랑스와 프랑스의 식민지 사회가 부조리하다고 보았다. 프랑스 본토인이 아니고 알제리에 살았기 때문에 까뮈의 눈에는 프랑스의 부조리가 명확하게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까뮈는 끝내 자살을 거부하고 자신의 역할을 찾았다.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끊임없이 정상으로 굴려 올리는 시시포스 신화에 빗대어 그는 프랑스 기성 문인들에게 외면받으면서도 끊임없이 부조리한 사회를 고발하였다. 그의 존재에 대한 질문은 『이방인』으로 시작한다. 그는 『시시포스 신화』에서 ‘고집스럽게 나아가는 것, 이게 중요하다.’라고 말한 것처럼 자신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한 길만 걸었다. 그런 까뮈의 노력은 1957년 <오늘날 인간의 양심이 제기하는 문제들을 명철한 성실함으로 밝힌 그의 중요한 문학적 공적>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함으로 권위가 섰다.


*부조리와 관용

전후 프랑스 사회가 그들과 다른 피부색을 가진 까뮈(피에 누아르 Pied-Noir는 ‘검은 발’이라는 뜻이다.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뜨거운 햇빛 아래 사는 백인은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졌을 것이고, 『이방인』에서 마리의 피부도 구릿빛이라고 소개되어 있다)를 받아들임으로써, 그리고 까뮈가 노벨문학상을 받아 그의 행동에 권위를 세움으로써 프랑스는 까뮈가 지향하는 사회로 나아가게 되었다. 관용이라는 뜻을 가진 똘레랑스tolerance는 16세기 프랑스의 구·신교 종교전쟁 이후에 탄생한 단어이다. 그러나 프랑스는 수직적 관계를 중요시하는 카톨릭이 승리하여 국교가 되었고, 18세기는 절대 왕정, 19세기는 여러 혁명, 20세기 전후에는 여러 식민지를 거느리면서 不관용의 시대를 보냈다. 세계 2차대전으로 국토가 황폐해지고 알제리와 베트남, 캄보디아 등 식민지들이 전쟁으로 독립을 쟁취하면서 프랑스는 바닥부터 재건하기 시작했다. 그 시작이 똘레랑스이다. 그리고 프랑스인들에게 잊혀졌던 똘레랑스를 깨닫게 한 사람이 바로 알베르 까뮈라고 생각한다. 프랑스가 지금 세계의 앞자리에 당당하게 있는 이유는 부조리를 혁파하고 이치에 맞게 나아가기 때문인 듯하다.

까뮈는 47세라는 짧은 생을 살았다. 고대 그리스의 중용을 중요시하고 左와 右, 프랑스와 알제리 사이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던 도덕주의자. 그래서 자기네 편이 아니라는 이유로 모두에게 철저하게 아웃사이더가 된 영원한 이방인 까뮈. 외롭지만 보편적 정의를 향한 까뮈의 발걸음은 세계 곳곳에 퍼졌고, 지금 우리도 읽고 배운다.


주석과 해설이 훌륭하여 을유문화사의 『이방인』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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