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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책의 향기

#책15.『내가 죽어 누워있을 때』

윌리엄 포크너 1930 민음사

by 방수미

『내가 죽어 누워있을 때』는 애디 번드런이 죽음을 기다리며 누워 있고, 큰아들은 마당에서 관을 만들고, 딸은 부채로 엄마의 더위를 몰아내고, 남편은 그저 걱정만 하고, 세 아들은 별로 관심이 없다. 그리고 결국 애디는 죽고, 애디의 소원대로 멀리 있는 친정 묘지에 매장하기 위해 온 가족이 마차를 타고 떠나고, 마침내 오랜 고생 끝에 애디를 매장하는 이야기이다. 총 59개의 이야기가 있고, 15명의 독백으로 구성된다. 59개 중에는 죽은 애디의 독백도 하나 있다. 대부분 독자는 죽어가는 ‘나’를 애디로 생각한다. 나도 처음에는 애디를 중심에 두고 읽었으나 이내 생각이 바뀌었다.

원제는 『As I lay dying』이니 죽어가며 누워있는 사람인 “나”는 앤스 번드런이다. 그는 삼십여 년 동안 마음이 죽어가고 있었다.


그의 발이 상한 것은 어린 시절 일을 너무 열심히 했기 때문인데, 지금 그는 일도 안 하고 주변에 민폐만 끼치는 인물이 되었다. 불편한 시선은 가족들도 마찬가지이다. 거의 결혼과 동시에, 죽는 순간까지 앤스를 거부한 애디, 아버지의 말은 신경써서 듣지 않는 자식들. 주변 사람들도 번드런네 가족을 도와주는 것을 핑계로 앤스를 무시한다. 질식할 것 같은 공기가 무겁게 앤스를 깔아뭉갠 것이다. 잘하는 사람도 지적을 계속 받으면 주눅이 들고 더 못한다. 읍내에 애디를 보러 갈 정도의 노력과 정성이 있는 사람인데, 어느새 무능력의 대명사가 되어버렸다. 그는 그림자같이, 죽은 사람처럼 삼십 년을 살았다. 아마도 그 시작은 애디와의 결혼이었을 것이다. 툴이 그의 옷을 묘사한 장면을 보면 맞지도 않는 허름한 옷을 입고 있고, 쉽게 끼울 수 있는 틀니도 15년이나 끼우지 못했다. 뭐 하나도 제대로 챙겨주지 않은 애디가 마침내 죽자, 그는 삼십여 년 전의 묵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읍내로 갔다. 사실 번드런 가족 묘지가 아닐 뿐이지 40마일은 그리 먼 거리도 아니다. 비만 아니었다면 하루면 다녀올 거리이다. 읍내에서 피바디 의사도 쉽게 왕진을 오고, 쥬얼도 읍내에 가서 이발하곤 한다.


아흐레, 9일은 그리스 고전에서 환상의 세계까지의 시간이다. 오뒷세우스도 눈앞에 이타케를 두고 결국 10년이라는 세월을 보냈다가 다시 돌아온 것처럼,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의 앤스도 9일간의 여행을 통해 주눅 든 과거의 자신을 버렸다. 그는 죽어가다가 다시 살아난 셈이다. 그 시작으로 애디를 매장하자마자 새로운 부인을 얻었다. 이발도 하고 향수도 뿌리고 이도 넣고 키도 세우며 단정하게 말이다. 당당하게 말이다. 오뒷세우스가 환상의 세계에서 몇 번이나 죽을 뻔한 위기를 벗어나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와 “내가 오뒷세우스다”라고 외쳤던 것처럼. 윌리엄 포크너는 『오뒷세이아』의 내용에서 제목을 따왔다고 했다. 그는 한 남자의 고단한 인생도 같이 그렸다. 오뒷세우스가 환상의 세계로 흘러 들어간 후로, 그는 죽지는 않았지만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즉 그는 죽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오뒷세우스와 차이가 있다면 행복을 새로운 부인에게 찾았다는 것.


마을의 여자들은 남자들 위에 군림한다. 번드런 가족의 기묘한 여행 속에서 여자들은 모욕이라는 단어를 쉽게 쓰며 그들을 이해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배려를 받아주지 않았다는 이유이다. 얼마나 거만한 자세인가. 배려는 내가 아닌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코라도 겉으로는 애디와 앤스를 위하는 것 같지만, 막상 툴이 그녀의 의견에 토를 달자 못 들은 척 노래를 불렀다. 코라는 애디의 믿음이 부족하다는 망상에 계속 믿음을 강조했고 애디에 대한 방문을 선의로 포장한다. 포크너는 코라는 물론 불륜 관계인 휘트필드 목사와 애디를 통해 이중적인 기독교인도 고발한다. 기독교에서 강조되는 숫자 40. 번드런 가족의 기묘한 여행은 40마일에 끝난다. 이제야 정상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웃 사람들의 선의는 고마우나 적선하듯 하는 선의는 이제 앤스가 거부한다. 앤스는 비로소 애디의 장례식에서야 사람들의 얼굴을 마주 보며 자신을 찾았다. 애디를 제퍼슨에 묻어준 것으로 그의 과거 자신도 재퍼슨에 두었다. 새로운 번드런 부인과 보낼 노년은 행복할 것이다. 그도 이제 행복할 권리가 있다. 비록 자식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행복이지만 말이다.


어쩌면 포크너가 셋째 아들 달을 잭슨의 정신병원으로 보낸 것은 앤스처럼 불행하게 살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지 않을까. 캐시는 끌려가는 달에게 “거기에 가면 더 좋을 거야. 네겐 더 좋은 곳이야”라고 말한다. 그리고 코라는 달에게 필요한 것은 “그를 바로 잡아줄 배필이라”고 했다. 툴은 여기에 ‘결혼이 유일한 해결책인 사람은 이미 가망이 없는 경우’라고 생각했다. 젊은 앤스는 읍내까지 가서 부인을 구해왔지만, 불행한 결혼생활이었다. 우리는 자연과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앤스와 달이 많이 닮았음을 알 수 있다. 달은 작은 앤스인 셈이다.


윌리엄 포크너의 책은 어렵다. 한 권의 책으로 그의 작품세계를 알 수는 없지만, 나는 포크너가 미국 남부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그저 땅만 바라보고 사는 평범한 남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싶지 않았을까 한다. 의식이 흐르는 대로. 각자의 시선으로. 남북 전쟁 이후 패배적 분위기와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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