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에 담긴 우리의 감정들.
오토바이 수리점 사장이 매장밖을 마냥 바라보고 있었다. 배송하러 들린 아내가 일 안 하고 뭐 하시냐고 물었더니 손님이 없단다. 배달경기도 얼어붙어 배달기사들이 오토바이를 수리하러 잘 오지도 않는단다. 그래서 일손을 놓은 채 길가를 오가는 사람들을 하염없이 구경하는 중이라고 했다.
배송할 때면 늘 우리 부부를 위해 쌍커피를 챙겨주던 파스타집도 점심나절임에도 손님이 뜸해 보인다. 아파트 상가 2층에 위치해서 택배상품은 계단을 통해서 날라야만 했다. 꽤나 무거운 상품을 배송한 후에 뒤돌아서려는데 황급히 카페주인 부부가 불러 세웠다. 커피를 권하는 바람에 잠시 기다리던 나는 놀라고 말았다.
차가운 아메리카노 두 잔을 내어주면서 한잔에는 시럽을 따르고 표시를 해서 주는 게 아닌가. 우리 부부가 함께 일하는 것을, 그리고 아내는 꼭 시럽을 탄 커피를 마신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표시된 것은 사모님 드리세요."라며 건네는 부부의 세심한 친절에 나는 감동을 받았다.
배송 갈 때마다 받아 든 커피가 미안해서 파스타를 몇 번 포장주문했다. 심성이 착한 사장님 부부가 잘되었으면, 매상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요즘 부부의 표정이 그리 밝지 못하다.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에게서 돈들이 사라져 갔다.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생존을 위해 나만의 "W(윌리)"를 찾고 있었다. 스스로 살길을 찾아야만 하는 이 땅 위에서 돈은 가장 유력한 희망이다. 서글프게도 돈이 우리 인생의 전부를 차지해 버렸다. 돈이 사라진 현실 속에서는 사람들은 그저 탈출을 꿈꿀 뿐이다. 20만 원이면 한 달을 살아갈 수 있다는 정보에 말이 통하지도 않고, 생활환경도 낯선 머나먼 동남아 어느 외딴 소도시에서의 고달픈 이방인의 삶조차도 기꺼이 감내하겠다며 탈출을 희망한다.
배송하고 되돌아오는 빵집 카페 앞 사거리에서 발밑에 뭔가가 하얗게 반짝거린다.
백 원짜리 동전이었다. 모카빵 한 개가 3,800원, 짜장면이 7,000원, 짬뽕이 12,000원인 세상에서 백 원짜리 푼돈은 이젠 발 디딜 곳이 없다. 사람들의 눈밖에 난 채 빵집 앞 사거리의 길바닥 위에 꽤나 오랫동안 그렇게 나뒹굴고 있었나 보다.
택배를 배송하면 한건에 팔백 원이다. 푼돈 백 원짜리 여덟 개로 택배기사인 나는 먹고산다. 그래서일까. 선뜻 지나치지 못한 채 자화상 같은 땅바닥 위 동전을 향해 손을 내민다. 크나 작으나 푼돈도 돈이다.
사람들은 이것저것 가질 수만 있다면 행복해지리라고 믿는다. 이것은 우리 불행의 원인이 불완전하고 결점 많은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감을 의미한다. 프랑스 사회학자 쟝 보드리야르는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소비하는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가치를 드러낸다고 진단했다.
상대보다 탁월한 이미지를 드러내기 위해서 경쟁적으로 소비하고 우리의 욕망은 끊임없이 자극받는다. 돈을 향한 우리의 과도한 욕망은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사실을, 자신의 불완전한 부분을 감추고 억누르기 위한 수많은 몸부림 중에 하나였다.
어쩌면 돈 버는 재능이 없는 사람들은 기회가 풍부한 사회보다는 성취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설득력 있는 구실을 제공해 주는 불평등한 상황들이 오히려 더 편안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 결과 서서히 풍요로운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은 자기실현의 기회를 잃고, 무기력하게 자신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무능한 존재가 되어간다. 궁핍과 결핍에 시달리는 삶의 피로 속에서 수동적인 삶의 존재로 전락해 버렸다.
자본주의의 소비적 폭력성은 남다른 삶을 살고 남다른 행위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원초적인 본능을, 돈을 향한 욕망을 한층 더 과열되게 부추긴다. 다른 이에게 줄게 아무것도 없지만 관대한 것처럼 포장하고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으면서 포기를 내뱉으면서 사람들은 그렇게 돈 앞에서 히스테리적이 된다.
사람들은 그렇게 돈 앞에서 제각각 병이 들어가고 있었다.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운 센터에 도착한 나는 탑차 뒷문을 연다. 전날의 흔적인 새하얀 스티로폼 잔재들이 바닥에 흩어져있다.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것들 조차도 마치 밤하늘의 별인 양 새하얗게 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무신경하고도 습관적인 나의 빗자루질에 탑차 밖 어두움 속으로 이내 흩뿌려져 사라졌다.
인생이란 밤하늘에 떠있는 수많은 밤별들과 그것들을 향해 마주한 우물처럼 서로 좁혀질 수 없는 거대한 간극이 존재했다. "그러나 무엇인가 더 있다. 이 느리고 공허한 시간 속에서 온몸으로 느끼는 슬픔이 영혼에서 마음으로 치솟는다. 모든 것은 내가 느끼는 감각이자 내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외부적인 무엇이라는 쓰라린 자각"이라며 삶의 간극사이에서 페소아는 힘겨워했다.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책>중에서>
나와는 상관없이 다가왔다가 우리를 휘감아 치는 현실 속에서 그가 말한 "쓰라린 자각"이란 결코 나 자신을 위해서 그 무엇도 실현할 수 없으리라는 불안함을 의미했고, 그것은 삶을 향한 깊은 갈증을 불러왔다. 우리 안에는 항상 다른 무엇이 되고픈 욕망이 어린아이 마냥 끊임없이 칭얼거린다. 그런 힘겨운 보채임이 강렬해질수록 우리의 불안은 점점 더 커져가고 그의 말처럼 모든 것에 흥미를 느끼지만 무엇에도 붙들려있지 않고, 모든 일에 반응하지만 늘 탈출을 꿈꾸며 살아갈 뿐이다.
동료 택배기사들의 탑차들이 하나둘씩 들어오고 레일이 요란한 굉음과 함께 돌아가기 시작하는 순간에야 비로소 나는 꿈속의 드높은 왕좌로부터 내려와 이름 없는 택배기사로 다시 되돌아왔다. 그저 평범하고 이름 없는 택배기사인 나는 소음과 먼지가 진동하는 작업현장 속에서 내 영혼을 구원이라도 하듯 부지런히 손발을 움직였다. 페르난두 페소아, 그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하는 일은 아무 가치가 없고 우리가 하는 일은 단지 시간을 흘려보내기 위해서 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시간을 흘려보내고 침묵을 흘려보낸다.
아무 형태 없는 세상이 나를 스치고 지나간다.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책>중에서>
사람은 소유권이 거의 없거나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존재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 하지만 자기 자신의 일부가 아닌 것들에게 악착같이 집착하며 소유하려 든다. 인생이란 가진 것이 적을수록 희망할 것이 점점 더 많아진다. 재미있게도 사람이 지닌 영구적인 결핍상태는 자신이 지닌 희망과 믿음을 일깨운다.
에릭 호퍼는 "필요한 것은 바로 즉시 채워지고 세상의 문제는 즉각 해결되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세대가 후대까지 남을 만한 가치 있는 것을 과연 만들어낼 수 있을까?"라며 회의적으로 반문한다.
산다는 것은 타인의 의도대로 택배를 나르며 사는 일이다. 르무통운동화, 수향미, 건강식품들, 원터치캠핑텐트, 나와는 상관없는 무수한 상품들이 흘러왔다 밀려간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생각은 자유롭고 흘러오는 크고 작은 택배상자들을 하나씩 붙들어 부지런히 탑차에 옮기는 동안 마법에 걸린 듯 잠자던 내 영혼은 산책을 시작했다.
나는 느낌에 따라 내 삶의 풍경을 그려낸다. 내 감각들로 마음의 휴식을 일구어낸다. 때로는 힘겹고 고달프지만 내 삶이 여기에 존재하기에 곁에서 일하는 동료 택배기사들이 한없이 정겹다.
나는 시간을 한껏 잡아 늘리고 싶고, 아무 조건 없이 나 자신이 되고 싶다.
한 뼘씩, 한 뼘씩
원래 내 것이던 내면의 땅을 정복했다.
조금씩, 조금씩
무의미하게 머물렀던 그 늪을 되찾았다.
나는 무한한 존재인 나를 낳았으나 나 자신을 나로부터 억지로 끄집어내어야 했다.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책>중에서>
그렇게 나는 반복적이고도 분주한 일상의 움직임 속에서 나의 내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한때 나는 돈의 힘과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한 만족스러운 감정은 서로 뗄 수 없이 강하게 엮여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음을 서서히 깨달았다. 물고기에게는 하늘을 높이 나는 날개도, 육지를 쏜살같이 내달릴 다리도 필요하지 않다. 그저 흐르는 물결을 따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헤엄쳐 나갈 수만 있다면, 때론 그저 흘러가는 대로 자신을 내맡기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경제적 암흑기였던 1920년대의 경제대공황을 경험한 작가 스테판 츠바이크는 최악의 인플레이션으로 사람들의 재산이 시간이 갈수록 햇빛아래 버터처럼 녹아내리고, 자고 나면 자신들의 재산이 절반이나 사라지는 것을 매일 경험해야 했다. 그는 돈이 실패한 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삶의 강력한 연속성을 목격했다.
기차는 붐볐고 우편물은 제시간에 도착했고, 제빵사는 빵을 굽고, 농부는 땅을 일구고, 아이들이 잉태되고 태어났으며 모두가 예전처럼 자신의 소명, 성향, 재능대로 살아갔다. <슈테판 츠바이크/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는 말한다. "돈은 방문객 그 이상도 아니다. 나는 돈의 주인이 아니고 돈이 내 삶의 지배자가 되는 것도 원치 않는다. 우리의 진정한 안전은 가진 재산에 있지 않고 우리가 누구고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달렸다."
하찮은 인간일수록 자신을 대단하게 여긴다. 삶 속의 계산도 간단해진다. 만사 모든 것을 돈으로 쉽게 퉁치듯 계산하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계산법은 자신의 축복을 계산하는 것이라고 한다. 천만 원도 푼돈 백 원에게서 나왔다. 땀 흘려 택배 하며 겸허히 깨달은 사실이다. 사람들은 택배기사가 버는 월 천만 원에 열광들을 하지만 팔백 원이 천만 원이 되기까지 감내해야 하는 시련과 땀방울은 알지도,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돈 이외의 가치들을 제대로 볼 수 있어야 삶의 축복을 제대로 계산할 수 있으리라.
오늘 배송할 짐들을 모두 실은 채 길을 나섰다. 2016년 산 중고택배차 포리를 앞질러 날렵한 빨간 페라리가 굉음을 내며 앞질러갔다. 이마에 커다란 별을 붙인 검정 벤츠세단이 깜빡이도 없이 앞으로 끼어든다. 하지만 세상을 벗어나 나만의 속도로 달리기로 결심한 나는 그저 그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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