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생각 한 줄>
“책은 침묵 속에서 깊어지고, 그 시간을 견딘 사람만이 자기만의 문장을 가진다.”
책은 언제나 고요 속에서 태어난다. 수많은 책이 서점에 줄지어 서 있지만, 그 시작을 들여다보면 결국 한 사람의 혼자 견딘 시간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시끄러운 세상 속에서 쓰인 책은 많지 않다. 오히려 외부의 소음을 잠재우고 자신과 마주한 순간들을 통과한 끝에 한 권의 책이 세상에 나온다.
혼자는 외로움과 다르다. 외로움이 비어 있는 상태라면, 홀로 머무르는 시간은 자신을 채우는 과정이다. 조용한 공간 속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마주한다. 세상의 소음을 잠시 내려놓고,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 일. 그것이야말로 혼자 보내는 시간의 가장 큰 선물이다. 글을 쓰는 사람은 반드시 이 과정을 거친다.
나는 36년 동안 소방관으로 살아왔다. 불길과 싸우는 현장에서는 머릿속을 비울 틈조차 없었다. 언제나 긴급한 상황, 언제나 누군가의 도움을 청하는 목소리에 응답해야 했다. 하지만 정년퇴직을 하고 나니, 문득 찾아온 고요한 시간이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반가웠다. 소방관 시절엔 미처 돌아보지 못했던 내 안의 이야기들이 침묵 속에서 하나둘 깨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이 모여 책이 되었다.
책은 세상과의 대화가 아니라, 우선 자기 자신과의 대화에서 시작된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후회하고 무엇을 소망하는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묻고 또 답하는 과정. 이처럼 자신과 마주하는 싸움은 외롭고도 치열하다. 수없이 원고를 지우고 다시 쓰는 동안, 작가는 자기 자신을 끝없이 다듬는다. 그 시간을 버텨낸 자만이 한 권의 책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다.
우리가 사랑하는 고전들도 그렇다. 도스토옙스키가 감옥에서 써내려간 고뇌의 문장들, 헤세가 청년의 방황을 끌어안고 쓴 <데미안>, 법정 스님의 산방에서 탄생한 글들. 모두 개인이 깊은 내면의 침전 시간을 견디며 얻은 결과물이다. 그런 시간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그 문장들을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연결의 시대를 산다. 스마트폰 속 세상은 늘 떠들썩하다. 하지만 진짜 글쓰기는 그 소란에서 벗어나 홀로 머물 때 가능하다. 혼자 있음은 두려움이 아니라 성숙으로 이끄는 길이다. 내가 온전히 나를 만나는 순간, 세상 누구도 대신 써 줄 수 없는 문장이 흘러나온다.
책은 그래서 단순한 지식의 집합이 아니다. 그것은 한 인간의 내면에서 숙성된 흔적이다. 작가가 자기 삶과 마주하며 흘린 눈물과 웃음, 번민과 깨달음이 고스란히 담긴 그릇이다. 그렇기에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활자를 따라가는 일이 아니라, 그 사람이 견뎌낸 시간을 함께 건너는 일이다.
혼자 머무는 순간은 작가에게 칼날이기도 하다. 평소에는 지나치듯 흘려보낸 경험들이 침묵의 공간에서는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모멸감, 상처, 실패, 두려움 같은 감정들이 한 줄의 문장 앞에서 벽처럼 가로막는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우리는 글을 그만둘 것인지, 혹은 그 벽을 한 번 더 넘어볼 것인지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된다. 이 질문에 정직하게 답하는 시간이 작가를 성장시킨다. 조용한 시간은 무덤이 아니라 더 깊은 층으로 내려가는 통로였다. 글을 쓰며 나는 깨달았다. 그 시간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강할수록, 그 안에는 반드시 만나야 할 내가 숨어 있었다. 그 만남이 끝날 때, 비로소 한 권의 책이 시작된다.
나는 믿는다. 앞으로 내가 쓸 모든 책도 결국은 이런 조용한 시간의 산물일 것이다. 다시 농장에서 흙을 만지고, 자연과 함께 호흡하는 지금의 고요함조차도 언젠가는 또 다른 책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책은 침묵에서 태어나 세상과 만난다. 그 시간을 피하지 않고 걸어가는 한, 우리는 언젠가 자기만의 목소리로 세상에 말을 걸 수 있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책이 된다.
<독자에게 전하는 메시지>
혼자만의 시간을 두려워하지 말자. 글쓰기에 필요한 것은 번쩍이는 영감이 아니라, 나를 마주하는 정직한 시간이다. 당신이 견딘 단 한 줄의 순간이 언젠가 누군가의 삶을 바꾸는 언어가 된다.
<이웃의 공감 댓글>
출근 전 작가님의 글을 잠시 읽고, 다시 돌아와 정독해 보았습니다. 고독과 외로움은 다르다는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내 목소리를 채워 나가는 일,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고독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의 모습이라 생각됩니다. 요즘 저 역시 저만의 고독을 누리고 있는데, 그 시간이 더없이 소중하고 좋습니다. 저를 마주하는 시간이 곧 저를 가장 잘 알아가는 시간이기에 늘 그 고독을 즐겨 보려고 합니다. 작가님께서 많은 고전을 추천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학창 시절 읽고 큰 여운을 받았었는데, 책장에 꽂힌 『데미안』을 다시 한 번 정독해 보아야겠습니다. 늘 응원합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작가의 답글>
말씀처럼 고독은 외로움과 달리, 나를 가장 잘 알아가고 채워가는 시간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 귀한 순간을 즐기고 계시다니 정말 멋지십니다. 헤세의 『데미안』을 다시 펼치신다면 또 다른 깊은 울림을 만나게 되실 거라 믿습니다. 저 역시 응원드립니다. 그리고 함께 고전과 고독의 길을 걸어가고 싶습니다.
<작가노트>
퇴직 후 찾아온 조용한 고독이 내 삶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그 침묵 속에서 나는 비로소 나를 마주했고, 그 만남이 글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