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리는 저녁

눈 내리는 저녁

by 문경숙 입니다








눈이 내린다. 바람에 흩날리는 순백의 꽃잎들은 점점 어두워가는 저녁나절을 환히 밝히며 차곡차곡 쌓인다. 이런 날은 가라앉은 감정이 봄날처럼 들떠 오른다. 너울너울 날아와 창가에서 나를 들여 다 보고 가볍게 사라지는 눈. 이처럼 은밀한 날갯짓으로 속삭이듯 들어와 유혹하는 이가 없었다. 눈을 만나러 거리로 나선다.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을 날아와 머리 위와 어깨, 손등에 떨어지는 이 가벼운 꽃잎의 무게를 어떻게 달수 있을까. 목덜미로 파고드는 서늘함과 가슴 한쪽을 마구 간질이는 설렘의 무게는 또 얼마나 될까. 다락방에 꼭꼭 숨겨 두었던 그리움과 이루지 못한 꿈들이 되살아나기도 하고 흔적 없이 녹아 버린다.

걷는 길은 어디라도 좋다. 강물이 흐르는 갈대밭도, 가로등 노란 불빛이 사는 외진 골목길도, 불빛이 화려한 도심도 좋다.

혼자도 외롭지 않다. 살며 꺼내보지 못했던 조심스러웠던 순간들이 지금 이 시간과 섞이고 사유하며 걸어간다. 내리는 눈발에 귀를 기울이면 ‘사락사락’ 지난 나의 발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뒤 돌아본다. 옆을 스쳐 가는 사람들도 정겹다. 눈 내리는 거리를 걸어가는 다정한 연인은 더없이 따뜻할 것이다. 그들의 모습은 현실을 벗어난 영화 속 장면처럼 아련하게 다가온다.


그래서인지 내 고향 남도에서는 겨울철에 혼인하는 일이 많았다. 나를 예뻐했던 당숙모도 함박눈이 내리는 날 가마를 타고 시집을 오셨다. 이날은 아이들도 마당에 깔아놓은 멍석 위에서 잔칫상을 받았다. 차려놓은 음식 위에 하얀 눈이 고명처럼 내려앉았다. 우리는 외양간에 딸린 사랑방에 신혼살림을 들인 신방을 구경했다. 날아가는 봉황새가 곱게 수놓아진 베개가 원앙금침 위에 나란히 놓여 있는 신방이었다. 아랫목 벽 위에 걸린 햇대보에는 화사한 모란꽃이 피어 여러 마리의 나비들이 날아다녔다. 그 어디에도 신방보다 더 정갈하고 고운 색으로 빛나는 방은 없을 것이다. 다음 날 아침 하얀 눈이 소복이 내린 마을 길을 다홍치마와 연두저고리를 입은 색시가 가냘픈 어깨 위에 흰색 배자를 살포시 걸치고 신랑을 따라 어른들에게 인사를 다녔다. 할머니와 엄마가 신랑 신부의 손을 잡고 “어쩜 이렇게 잘 어울리는 천생배필 한 쌍일까” “어젯밤 둘이서 따뜻하게 잘 잤느냐”는 짓궂은 인사말을 건넸다. 수줍어하는 당숙모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 또한 겨울날의 고운 색시가 되어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꼭 잡고 눈길을 걸어가고 싶었다. 아이들은 특별한 잔치가 끝나버린 아쉬움에 뭔가 더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며 신랑 신부를 졸졸 따라다녔다.


눈은 마법처럼 어린 친구들을 동화의 세계로 이끌어간다. 눈송이가 푹신하게 쌓이면 우리는 묵언의 약속이라도 한 듯 마을 언덕배기에 모였다. 눈 내리는 날 놀 거리는 또 얼마나 많은가. 그 어느 곳이라도 최고의 놀이동산이 된다. 비료 포대 썰매와 눈싸움에 지칠 때는 발자국으로 눈을 눌려 돌려가며 꽃을 만들기도 했다. 해가 질 때까지 얼어붙은 손을 ‘호호’ 불면서 엉덩이가 흥건히 젖어 너덜거리며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눈 위에 납작 누워 천사가 되려고 날개를 퍼덕거렸던 나의 어린 동무들은 지금 어디서 이 눈을 맞고 있을까.


나이를 먹어가면서 눈 내리는 밤을 오랫동안 기다려 온 것같이 느껴진다. 사는 것이 힘들고 지칠 때면 깊은 산골짝에 납작 엎드려 있는 흙집에 갇히는 꿈을 꾼다. 이웃집과 긴 새끼줄을 서로 걸어놓고 그 끝에 조그만 종을 달아 놓았다. 질량 불변의 법칙 따위 존재하지 않는 양, 명주솜 같은 부드러운 눈이 길 위에 쌓이고 작은집을 덮었다. 해가 뜨지 않아도 눈빛만으로 환하고 외양간의 암소 방울 소리가 울렸다. 그곳에서 오롯이 혼자만의 세상에 고립되어 자신과 마주할 것이다. 참을 수 없을 만큼 외로우면 이웃집과 연결해 놓은 줄을 잡아당기며 종을 울릴 것이다. 종소리가 들리는 새끼줄을 따라 길을 만들어 나가다 보면 저만치서 눈을 헤치고 오는 사람은 얼마나 반가운 사람일까.


혼자만의 상념에 빠져 있다가 집으로 되돌아오는 길은 나갈 때와는 전혀 다른 낯선 길로 바뀌어 있다. 아무도 받아들인 적이 없는 처녀림같이 어떠한 흔적도 없다. 밤이 깊어 가는데도 세상은 백야처럼 환하다. 온 세상 가득히 내리는 눈은 우울한 겨울을 포근하게 감싸 안으며 환상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이때가 아니면 걷기 힘든 풍경 속으로 혼자서 꿈결처럼 걷다 보면 어느덧 거리감도 사라지고, 일상을 이끌어가던 감정의 끈도 툭, 끊어져 텅 비인 가슴 안으로 눈이 내린다. 나의 삶은 어디만큼 걸어왔는지, 죽음까지는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이런 길이라면 저 멀리 죽음 너머의 길도 두렵지 않게 걸어갈 생각이 든다. 마음속에 정갈한 사랑이 차오른다.


내일이면 이 환상은 끝이 날 것이다. 눈이 녹으면서 질퍽해지는 순간 황폐하고 얼룩진 현실과 마주칠 것이다. 들떠 오른 감정은 더욱 차갑게 가라앉아 걱정거리 가득한 일상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그럼에도 꿈같은 시간을 살 수 있는 오늘 같은 날이 찾아온 것은 자연이 준 선물이다. 내일 걸어야 할 길이 거칠고 험할지라도 지금 걸어가는 이 순간을 즐길 줄 알면 되는 것이다. 작가님, 커피 한 잔에 글 쓰기 좋은 오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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