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여기 있지만, 마음은 여전히 친정에 붙잡혀 있다.
결국 다시돌아온 명절이다.
이번 추석연휴는 특별히 더 길기에, 직장에서 지친 나는 특별히 이번 연휴를 더 기다리고 있었다.
연휴가 다가오자 신나는 기분은 감출 수 없었고, 연휴 첫날인 어제는 이것저것 해보고 싶었던 활동을 남편을 끌고나가 하루에 몰아서 하고서 밤늦게 들어왔다.
그렇지만 문득문득, '시댁에는 언제가지..친정은 어떻게하고?' 라는 생각에 점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나는 지독한 회피형이다...
어려운일이 있거나, 특히 감정이 극단적으로 힘들거나 괴로운 일이 일어나면 자체 방어기제가
발동되서 마치 없던 일처럼 지워버리고 뇌 한구석에 밀어넣는 자동화된 회피기술이 있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명절에는 그렇게 지독하게 미뤄오고 외면했던 친정문제를 다시 마주하게 된다.
이번연휴는 특히나 길다. 길어서 너무 즐거웠지만 긴 만큼 밖에 나가서 온가족이 다같이
산책하고 여행가는 모습을 보고있노라면 너무 우울해지고 가슴 한구석이 아파온다.
남편도 이런 긴 명절에 며느리이기도 한 내 눈치를 보느냐, 본인의 집과 어디 외출을 가고싶어도 미리 가지 못하는듯하고, 그렇다고 부부 둘이서만 이렇게 보내고 있는 연휴가 조금은 무료한듯 해보인다.
그렇지만 나는 명절이 아닌 연휴에 미리 시댁과 여행을 가거나, 놀러를 가서 아무 생각없이 효도하고 웃고떠들 자신이 없다...
밖에 나가면 자식들과 같이 있는 다른 부모들 모습을 보며, 나와 똑같이 씁쓸해하거나 또는 나를 원망하고 있을(이쪽이 가능성이 크다.) 내 친정부모가 자꾸만 머리속을 헤집고 있기때문이다.
아무일 없던것 처럼 친정동생에게 연락해볼까 싶기도 했다.
"ㅇㅇ 아 명절인데 뭐해?" 라고.. 그러기에는 동생입장에선 갑자기 뭐지 싶을것 같다.
참..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부모와의 잘못끼워진 단추같은 관계가 평생을 발목을 잡는 느낌이다.
그러다 문득 결혼 전, 싱글이던 시절 아빠는 해외에 파견을 가있을 때 나와 엄마, 동생만 집에서 살고 있을때가 생각난다.
나는 그때도 나름 첫 회사를 열심히 다니고 있었는데, 설 연휴를 목전에 앞두고 엄마가 갑자기 내게 트집을 잡으며 나를 또다시 '엄마를 괴롭히는 천하의 나쁜년'으로 만들고 소리를 지르고 난리를 쳤었다.
이런 상황이 그때의 나에게는 익숙했지만 정말 이제는 질릴만큼 질리고 스트레스로 머리가 터질것 같아서 그날은 회사에서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지 않고 난생 처음 반항적인 외박을 하기로 작정했다.
그런데 왠걸, 설 연휴라고 회사에서 3kg짜리 과일바구니와 와인을 선물해주신 것이었다. 마음은 너무 감사했지만, 지금 엄마한테 이걸 갖다 줄 처지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딱히 맡겨둘 지인도 없어서 오늘밤은 집에 들어가지 않기로 결심했지만, 그래도 우선은 선물이 무거워 집으로 향했다.
집 현관문 앞에 도착해서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과일바구니와 와인만 현관문앞에 두고 동생에게 문자를 보내놓고 나왔다.
'ㅇㅇ아 과일만 집에 들여다줘.'
그러고는 회사동료 언니에게 전화하여 '언니 죄송한데, 오늘 밤만 회사기숙사에서 지낼 수 있을까요? 사정이 생겨서요..'라고 물어봤고, 언니는 흔쾌하게 이유도 묻지않고 '응 그래, 오늘 나는 없어 편히가서 쉬어' 라고 해주었다.
설연휴 첫날, 나는 그렇게 회사기숙사 방에서 혼자 밥을 먹고, 여유를 부렸다. 집에서 별다른 이유도 없이 나를 원망하고 나때문에 하루를 또 망쳤다고 분노하고 있을 엄마를 떠올리며...
왜 그렇게 나를 미워못해 안달이었을까, 왜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다 큰 딸인 내게 온갖 자신의 불안하고 부정적인 감정을 여과없이 전가했을까....
아마 추측컨데, 설연휴가 다가오자 엄마는 사회적으로 자신의 역할이 딱히 없으니, 자식을 키우느냐 엄청난 고생을 하고 있다고 해외에 있던 아빠한테 생색을 내고 관심을 받고 싶었던것 같다.
'나 놀고있는거 아니다. 이렇게 힘들고 문제있는 자식 키우느냐 괴롭고 힘들어 죽겠다.' 라고.
참..그때도 화목한 명절은 아니었는데, 지금 내가 그리워하고 있는 것은 어떤 것일까.
남들처럼 평범하게 가족과 지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서러움인 것 같기도 하고..좋은 딸이 될 기회는 이번생에 없는 것 같아서 인것 같기도 하고.
여전히 부모의 사랑을 갈구하고 있는것 같기도 하고..
어쨋든 연휴는 좋지만 가족과 보내라고 강제로 정해져있는 명절은 내게 너무 가혹하다.
명절에는 이러나 저러나 나만 또 천하의 불효녀 및 나쁜사람이 되는것 같기도 하고.
내가 생각하는 모든 분들은 다들 무사히 명절은 보내고 계실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