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체온증
겨울이 제일 싫다. 아니 무섭다.
왜냐하면 나에게 추위는 쥐약이기 때문이다.
여고 시절 무용시간에 둥글게 원을 그리고 포크댄스를 배울 때 한 바퀴를 돌며 체인지 파트너한 결과 내 손이 제일 차갑다는 결론을 내렸다.
기본적으로 체온이 낮고 특히 손발이 차다.
저렇게 손발이 차서 시집가서 아기나 낳것나?
간혹 나와 손이 닿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반응이었다.
파란 피가 흐른다.
차가운 성정으로 피까지 차갑다.
냉혈동물이라는 농담은 은근 열받는다.
그럴 때 소심한 복수를 한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은 체온이 낮대. 그 반대는 뭔지 잘 알지?"
타고 난 체질로 인해 억울하게 음해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그까짓 말들이야 상관없지만 진짜 내가 많이 추웠다.
10월 9일 한글날만 되면 내복을 꺼내서 입는다.
빨간 내복에서 시작해서 히트 발열 내복까지 진화를 거듭하며 차가운 나를 보온해 주었다.
내복 없는 겨울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초가을부터 입기 시작한 내복은 그래도 청춘의 피가 흐를 때인 30대까지는 5월 5일 어린이날쯤 벗었다. 점점 몸에 기름기가 빠지고 추위가 뼈를 때릴 중년의 나이에는 6월 6일 현충일이나 되어야 비로소 내복 빨래에서 벗어났다.
이렇게 내복과 살을 맞대고 비비며 체온을 나누면서 긴긴 겨울을 견뎌냈다.
생애 전환기인 갱년기를 나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확 치밀어 오르는 열감이 나는 오히려 좋았다.
평생 차가운 얼음에 갇힌 엘사 공주였다가 냉골인 방을 덥혀 주는 보일러의 온수가 흐르니 갱년기가 반가울 지경이었다. 참으로 이상한 체질인 것만은 분명하다.
한여름에도 땀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부자리를 흥건하게 적시는 새벽의 땀은 하루를 개운하게 시작하게 하는 찜질방이었다. 참으로 웃기는 상황이라 나를 찾아온 갱년기가 당황했을 것이다.
아이를 생산하겠냐는 걱정이 무색하게 아이를 순풍순풍 잘도 낳았으니 차가운 몸이 장하다.
그런데 갱년기라는 터널을 지나면서 체온이 몇 도 상승했다.
이제 내 손이 스쳐도 깜짝 놀라지 않는 사람들의 반응이 나의 체온이 많이 올라갔다는 증거이다.
하지만 발끝은 여전히 얼음장이어서 남의 편의 뜨거운 발을 난로 삼아 잠이 든다.
물론 내 발이 닿는 순간 화들짝 놀라는 일은 매일 밤 거르지 않는다.
"아니 아직도 나의 발에 적응하지 못한 거예요?"
짐짓 너스레를 떨지만 기온이 높아도 소용없고 뜨거운 물체에 닿아야 열이 전도되는 습성으로 인한 가혹행위가 살짝 미안하다.
하지만 끊임없이 운동하여 근육량을 키우고 반신욕과 족욕을 수년 간 해 온 노력의 결과로 손의 얼음장은 녹았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체온 1도를 올리면 암 발생률이 30%나 줄어든다고 한다.
소싯적 나였으면 암에 걸릴 확률도 높았다.
체온이 올라가면서 몇 년째 내복과 이별했다.
나의 내복 사랑을 익히 아는 가족들은 신기해했다.
"당신, 언제부턴가 내복을 안 입네? 현충일이 되어야 벗던 내복을 말이야."
"엄마, 엄마 내복 빨랫감이 없으니 빨래하는 것이 수월해."
빨래 담당 큰딸이 제일 좋아한다.
내복과의 이별은 겨울과 사랑의 시작을 울리는 신호탄이다.
겨울로 뚜벅뚜벅 나아간다.
내복 벗은 홀가분한 몸과 알맞게 데워진 마음과 함께.
평생 못 즐긴 겨울, 딱 기다려!
이제 너를 제대로 누려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