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작가의 책을 집게 될 때 몇 가지 판단 기준이 있다. 제목, 표지 뒤자인, 뒤표지에 그럴싸한 문장만 가득한 추천사 말고 책 내용에 관한 실질적인 정보가 있는지의 여부, 책날개에 쓰인 작가 정보다.
특히 요새는 이 책을 읽을까 말까 고민하는 사람에게 영양가 있는 정보를 제공하겠다는 생각이 있는 건지 모를 추천사만 뒤표지에 복사해서 붙여 넣는 경우가 너무 많다. 책을 내는 게 너무 쉬워져서(그럼에도 출간 작가가 아닌 나는 반성하자) 듬직한 경력이나 전작 없이, 하다못해 유의미한 소개 글도 없는 작가 정보도 판을 친다. 나는 이런 책들을 절대 읽지 않는다.
이번에 읽은 책 <밀크티와 고양이>는 확실히 그런 조건을 다 충족했다. 책 뒤에는 알차게 내용 줄거리가 쓰여 있고 작가의 경력도 책날개에 소개되어 있었다. 하지만 내가 이 책을 고르게 된 가장 큰 이유는 표지의 일러스트 때문이었다. 너무 귀여워! 제목마저 <밀크티와 고양이>라니 사랑스럽다. <용의자 X의 헌신> 이후로 일본 소설을 읽지 않은 나는 그렇게 당분간의 내 목표인 ‘재미를 위한 읽기’에 아주 적합한 작품을 만나게 되었다.
<밀크티와 고양이>
2025년 5월 출간
무랴아마 사키 지음, 최윤영 옮김, 출판사 빈페이지
주인공은 인구가 줄어 쇠퇴 중인 고향의 인쇄소 직원이다. 한 곳에서 살면서 한 직장만 가진 주인공인데, 안타깝게도 인쇄소가 일이 없어서 조만간 문을 닫으며 주인공도 일자리를 잃을 예정이다. 주인공은 인쇄소를 비롯해서 자신이 평생을 보낸 동네에서 크고 작은 인연이 있었던 가게들이 문을 닫는 걸 안타까워한다. 내성적이고 소심하지만 사소하고 소외되는 걸 아낄 줄 아는 성격이라, 점차 스러져가는 것에 대한 주인공의 애정 어린 감상이 책 전반적으로 계속 등장한다. 이 책에서 반복되어 나오는 힐링 포인트 같다.
주인공이 커다란 애정을 보이는 또 다른 것은 바로 고양이다. 길고양이를 여러 번 구제한 적이 있는 주인공은 떠난 고양이들의 유해도 집에 보관하고 있을 만큼 고양이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데, 퇴근길에 몹시 심한 두통을 앓고 있는 와중에도 자신이 키웠던 것과 비슷한 검은 고양이를 길에서 발견하고 거두게 된다.
하지만 주인공의 그 심한 두통이 죽음의 징조일 줄이야! 작은 생명을 책임지게 되었으니 털고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하는 주인공의 수명은 안타깝게도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 그의 앞에 이른바 마신이 커다란 고양이 형태로 등장하고, 주인공은 인간으로서 죽은 뒤 마법사로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마법사가 된 주인공의 바람은 굉장히 소박하다. 면허가 없어도 몰 수 있는 캠핑카를 타고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사람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며 그들을 다독이는 것. 그렇게 주인공이 향하는 곳에는 그가 살던 쇠퇴하는 마을만큼이나 잊히고 꺾여가는 것들이 있다. 아무도 믿지 않는 마법이나 요정, 즐거웠던 옛날 기억, 아무도 살지 않게 됐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벚나무들이 남아 있는 탄광 마을, 동심을 기억하는 마음씨 등. 책은 이러한 소재들로 채워져 있고 마법사가 된 주인공은 이 사연들을 따스하게 바라보며 음식을 대접하는 방식으로 끼어든다. 사람과 요괴를 가리지 않고 말이다.
300페이지를 넘어서 은근히 볼륨이 있는 책이지만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정감 어린 동화책 한 편을 읽은 듯한 기분이 드는 소설이다. 형용사를 풍성하게 쓰는 문체도 그런 분위기를 거드는 것 같다. 주인공이 다른 이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게 주요 내용인 만큼 음식 묘사에도 집중했고, 전체적으로 감각적인 묘사에 힘을 쓴 모양새다. 분위기도 선하고 무해해서 읽으면서 스트레스 받을 일이 없다.
정리하자면 특별한 깊이는 없어도 한가한 주말에 2~3시간 정도 기분 좋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작품. 누구나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고, 나 역시 즐겁게 읽었다. 재미를 위한 읽기, 성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