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에 완전히 적응이 되었을 무렵, 내 뒤로 3번째 직원이 들어왔다. 그 직원은 한국인이었다. 드디어 한국인이 들어오다니 마음이 편해졌다. 다행히도 그 직원은 일본어를 잘했다. 억양이 굉장히 한국의 표준어스러워서 처음엔 많이 웃겼다. 내가 부산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한국 표준 억양의 일본어가 웃겼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웃긴 건 둘째치고 그 직원은 나를 가끔 화나게 만들었다. 가르쳐주는 대로 듣지 않고 자꾸 딴지만 걸어서 짜증이 났다. 그래서 많이 뭐라 하기도 했다. 차라리 못 알아들었을 때가 더 나았을 싶을 정도로 그 직원은 내 말을 잘 안 따라줬다. 덕분에 중국인 직원과의 대화에 통역은 해줘서 고마웠지만 매번 나를 화나게 하는데 재주가 있었다.
그는 나에게 "모르겠는데요? 아닌데요?"라는 말을 자주 썼다. 차라리 이 사람이 일본인이었다면 내가 말을 잘 못해서 그런 거라 이해하겠는데 한국어로 대화하는데도 외계인이랑 대화하는 거 같았다. 나보다 한 살 많아서 뭐라 하기도 조금 애매했다. 일부러 화나게 만드는 건지 계속 딴지를 걸었다. 그런데 주변에 일본인들은 그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으니 더욱 답답했다. 내가 화나는 이유도 그들은 전혀 알 수 없었다. 한국인에게 일본어로 가르쳐주는 게 더 이상한 거 같아 계속해서 한국어로 가르쳐줬다.
그래도 덕은 많이 봤다. 내가 말하지 못하는 것,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을 통역해주기도 했으니까 고마운 건 고마운 건데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이게 장난치는 건지 진심으로 그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일본어로 대화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말을 할 때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내가 부족해서 그런 거 구 나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어로 말을 하는데도 잘 안 통할 때면 너무 화가 났다. 차라리 알아듣지 못하는 게 나았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일본인들과 대화할 때면 상대의 감정에 더 집중할 수 있었고 들어줄 수 있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알아듣지 못하는 때랑 알아들을 때랑 똑같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다. 그 사람이 나에게 화나게 하지만 그것이 나쁜 의도라고 받아들이지만 않는다면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더 이상 화가 나지 않았다. 일상생활에서도 사람들 사이에서 대화를 하다 보면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들이 생기기 마련인데 이 방법을 적용하면 스트레스를 덜 받을 수 있었다.
내가 일본에서 생활하면서 알아듣지 못했던 상황이 오히려 나의 상황을 조금 더 멀리서 떨어져 바라볼 수 있었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해 주었다. 그 한국인 덕분에 나는 내가 배운 것들을 실생활에서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아무리 나를 화가 나게 하는 인간일지라도 그 사람의 행동에 대한 의도를 찾기보다는 온전히 그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이 내 정신건강에 좋다는 것을 깨달았다.
1차원적인 소통을 하면서 한 발 짝 멀리서 상대와 나를 바라보는 연습을 할 수 있었다. 오히려 알아듣지 못했던 내가 얻을 수 있었던 게 많았다. 그렇게 그 직원에 대해 용서를 하고 조금 더 너그러운 시선으로 받아들이니 스트레스를 덜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카페에서 일하는 시간이 4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코로나19로 귀국을 하는 결정을 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 동안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고 참 고마운 시간이었다. 만약 지금도 당신에게 화나게 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한 발 짝 떨어져서 그를 지켜보는 게 어떨까? 그 사람도 당신이 기분 나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표현하는 방식이 서로 다르기에 오해가 생겼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