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의 마지막 종강 후 출국장으로
24살의 여름이었다. 코스모스 졸업을 앞두고 앞으로 무엇을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내 눈앞에는 “새로운 기회인가?”라는 생각이 드는 일이 일어나 버리고 말았다.
원래 대학을 졸업하고 나면 어디든 워킹홀리데이를 떠날 작정이었다. 워킹홀리데이란 협정된 국가에서 보통 만 18세부터 만 30세까지의 청년들이 1년이라는 기간 동안 자유롭게 돈도 벌고 여행을 할 수 있도록 허가해 주는 프로그램이다. 젊었을 때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서 꼭 살면서 한 번쯤은 가고 싶었다.
그중에 나는 호주로 떠날까 고민했지만 신청만 하면 갈 수 있기 때문에 뭔가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그러다 아는 언니가 캐나다 워킹홀리데이를 너무 가고 싶어 했는데 어쩌다 보니 나도 캐나다 워킹홀리데이에 관심이 갔다. 그렇게 나는 남자친구와 같이 가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남자친구에게도 같이 가자고 권유를 했다. 얼떨결에 같이 신청서를 넣었지만 캐나다는 추첨을 통해 뽑혀야만 갈 수 있었는데 걸리면 가고 아니면 말고라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캐나다 워킹홀리데이에 걸리기만을 기다리던 어느 날 남자친구가 일본에서 하는 호텔 인턴쉽 프로그램에 참여하겠다고 나에게 말했다. 그 프로그램은 2개월이라는 기간 동안 참여하는 것이지만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가는 것이라 1년이라는 기간을 더 채우다가 올 수도 있었다. 나는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 장거리가 되어서 우리가 헤어지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계속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러다 문득 그냥 ‘나도 일본으로 떠나면 어떨까?’하고 생각이 들었다. 나에겐 일본이란 애증의 나라였다. 어린 시절 나에게 재미를 가져다주었던 애니메이션의 나라이면서도 역사적으로 보면 우리나라와 사이가 좋지 않은 나라이니 좋은 생각만 들지는 않았다.
고민을 하다 될지 안될지도 몰라 일단 일본에도 원서 접수를 했다. 캐나다랑 다르게 필요한 서류들이 많았다. 지원동기를 시작으로 온갖 적어내야 할 것들이 많아서 포기할까도 생각했지만 어쩌면 내가 새로운 시각을 얻을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캐나다에 접수한 지 몇 개월이 흘러도 감감무소식이고 일본에서의 발표가 며칠 안 남은 상황이었다.
“띠딩-! “
무슨 메일 한 통이 날아왔다. 영어로 적힌 이메일. 캐나다에서 온 초대 이메일이었다. 그 기쁜 마음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오예!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일본에서도 합격 소식이 들려왔다.
큰일 났다. 사실 일본어라고는 중학교 때 배운 게 다였다. 쉬운 단어조차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어릴 때 봤던 애니메이션에서 주워들은 것만 고작 아는 정도였다. 물론 영어도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미드를 엄청나게 봐서인지 뚫린 귀로 수능 영어 듣기만 만점 받았지 문법이라곤 전혀 알지도 못했다. 하지만 부딪히면서 배우는 거라고 무슨 자신감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본을 먼저 갔다가 그다음 캐나다를 가기로 결정했다.
급한 대로 일본어 공부도 시작했다. 그리고 들뜬 마음으로 일본의 도쿄에 있는 집들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가자마자 생활을 시작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한국에서 알아보고 계약까지 해버렸다. 워낙 가는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한국에서도 해결이 가능했다. 하지만 이때는 너무 아무것도 몰라서 선택한 방법이다. 이 방법보다는 직접 발품 팔아서 집도 직접 보고 고르는 것이 좋은 방법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출국 날이 되었다. 부모님이 데려다주신다고 공항까지 차를 타고 갔다. 하지만 엄마는 내가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아빠는 모르는 상태였다. 게다가 출국까지 같이하는 상황이라 아빠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사귄 지 8개월 차에 남자친구는 여자친구의 아버지와 첫 대면을 하게 생겼다.
체크인 카운터에서 남자친구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체크인을 하기 위해서 먼저 차에서 내렸고 아빠는 주차를 하러 갔다. 그 사이에 상황을 설명해 줬고 남자친구도 조금 당황했다. 그렇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아빠가 멀리서 반갑게 인사를 하려다가 옆에서 쭈뼛쭈뼛 인사를 하는 남자친구를 발견했다. 아빠가 쓰고 있던 선글라스 너머로 당황한 기색이 보였다. 그렇게 모르는 척 체크인을 하고 나니 아빠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조금 찝찝하면서도 설레는 마음으로 출국장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