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요즘 자동차 전시를 앞두고 자동차의 구동원리를 생각하고 있다. 자동차는 엔진에 기어가 물리면서 힘을 받아 구르게 된다. 기어가 물리지 않으면 힘을 받지 못해 헛바퀴를 돌게 된다. 엔진에 기어가 맞붙고 떨어지면서 자동차가 굴러간다. 기어가 물려야 굴러갈 수 있듯 인간 역시 의식과 대상이 접촉하면서 삶을 영위한다. 이 글은 우현이 남긴 예술철학에 대한 글을 읽고 현대성에 관련된 부분을 내 나름대로 이해한 후 써 본 글이다. 우현 선생의 예술론에 대해 현대성이 어느 정도 있는지 자신할 순 없다. 그저 나의 소박한 우현 이해에 가까울 것이다.
사람에겐 매일 늘 반복되는 습관 이외에 또 다른 의식의 세계가 있다. 즉 타성과 관습에 젖은 의식 이외에, 무언가를 알아채는 또 다른 의식이 인간의 심층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알아채는 의식을 편의상 ‘순수의식’이라 부르기로 하자.
순수의식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평생 잠들어 있는 사람들은 오랜 습관이나 주어진 관습에 안주해 살 뿐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창조적 소수자도 있다. 창조적인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든, 어느 분야이든 자기 분야의 삶의 예술가이다. 순수의식은 어떤 한 가지 일에 몰입하거나 집중할 때 더욱 활성화된다. 순수의식이 명민하게 깨어있을 때 창조적인 예술이 탄생한다. 순수의식이 깨어있고 활성화된 상태는 어느 한가지에 몰입해 있을 때이다. 무언가를 해결하고자 몰입하고 있던 그 순간에 스파크가 일어난다. 엔진에 기어가 맞물리듯 말이다. 뇌에 벼락이 쳐 직관이나 영감이 떠오른다. 그런데 이게 저절로 되는 게 아니다.
문제는 늘 깨어 있어 자기가 해결하고자 하는 미션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몰입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꿈에서라도 문제가 해결된다. 뇌는 엔진처럼 자나 깨나 그 생각에 집중하느라 잠드는 생각에도 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기어가 맞물려 돌아가게 된다. 세상을 산다는 것은 순수의식이 세상살이의 온갖 체험을 하는 과정이다. 순수의식은 백지상태가 아니다. 지, 정, 의의 체험이 순수의식의 깊은 속알맹이에 녹아 있다가 어느 순간 사건과 사물을 만나 구성되어 나타난다. 그 세계는 사실 창조도 아니고 모방은 더욱 아니다. 바로 구성의 세계, 즉 몽타쥬의 세계이다. 모든 예술품은 궁극으로 가면 갈수록 재구성되어 나타난 것이다. 그곳에 남과 다른 자기만의 독창성과 개성이 있다. 우현은 예술이야말로 몽타쥬라고 주장하였는데 매우 현대적인 해석이라 할 수 있다.
고유섭에 의하면 사실 아름다움은 ‘앎’에서 연유하며, 앎이라는 인식작용이 바로 예술이라고 한다. 순수의식이 사람, 사건, 사물이란 대상을 만나면 ‘존재 자체의 드러남’이 있게 된다. 이게 예술이다. ‘존재 자체의 드러남’에는 미(美)와 추(醜)의 분별이 없다. 멋지고 예쁜 ‘아름다움(Beauty)’만이 예술이 아니라, 고통스런 삶의 현실을 고발하는 작품 역시 존재 자체의 드러남이다. 동서양의 예술품은 모두 앎으로 표현한 예술이다. 고통 역시 삶에서 직면할 수밖에 없는 요소이다. 가난한 민중에겐 삶이 지옥인 경우도 있게 마련 아닌가. 예를 들면 밀레의 <만종>은 목가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가난한 농부들의 비참함을 보여주고자 농부의 발치에 놓인 바구니에 원래에는 아기의 시체가 놓여 있었다고 한다. 존재 자체의 드러남은 현대사상과 예술의 핵심 화두 아닌가. 우현의 예술론에는 현상학의 명제가 들어있다. 바로 ‘현상에서 본질을 탐구한다’가 그것이다.
인식작용의 가장 깊은 속 알맹이에는 지식의 범위를 넘어선 심안(心眼)이 자리 잡고 있다. 바로 순수의식의 자리이다. 심안이 있는 자는 고정관념, 선입견, 편견을 벗어난다. 자유의 경지가 열린다. 그 결과 새롭게 무궁무진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고유섭이 말한 ‘한국의 미가 무엇인가’ 역시 그가 발견한 하나의 심안이다. 늘 새로운 시각은 열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