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인재(human intelligence)를 키우는 방법
*제목 어그로 죄송합니다. 원래 글 제목은 “디자이너 채용에서 포트폴리오 평가에 의존하면 안되는 이유” 였는데 너무 길고 따분해보여서 과감히 줄여보았습니다.
전문을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글은 디자이너 포트폴리오 자체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담은 글이 아님을 미리 밝힙니다. 이 글은 오늘날의 포트폴리오 평가 방식이 디자이너들에게 초래하는 혼란, 이로 인해 발생하는 디자인 산업과 시장의 후퇴, 앞으로 우리가 능동적으로 새로운 인재를 키우고 그들과 협업할 수 있는 방법을 담은 글입니다.
By 시작팀 박선우
저는 2024년 11월 3주차부터 2025년 3월 1주차까지 총 15주간, 매 주 6명의 디자이너에게 30분씩 무료 포트폴리오 피드백을 제공해왔습니다.
이제 누적 피드백 대상자 100명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고요.. 크리스마스와 설 연휴에도 쉬지 않았으니 지난 4개월간 사실상 매일 진행했었네요.
본업 스케줄과 병행하다보니 포트폴리오 피드백 시간은 항상 아침 7시에서 8시 사이였습니다. 이른 아침인데도 피드백에 참여해서 열띤 이야기를 나눠주는 디자이너 분들의 열정에 매일 감동을 받았고, 한편으로는 짠한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무료 포트폴리오 피드백은 수요가 없을 때까지 어떻게든 시간을 짜내서 지속할 계획입니다.
왜 생고생해서 대가도 없이 포트폴리오 피드백을 하냐구요? 한국에 디자이너 포트폴리오 피드백을 무료로 해주는 곳은 저희 시작 팀 밖에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하.. 무료 포폴 피드백을 주기적으로 해주시는 다른 분들이 많이 나타나면 조금씩 쉬어볼까 합니다.
견지망월. ‘달을 보라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더니, 달은 잊어버리고 손가락만 본다’는 뜻을 담은 고사성어입니다.
명성이 높은 승려에게 한 불자가 찾아와서 가르침을 전해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승려는 '나는 글을 알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이를 들은 불자는 크게 실망하였다. 그러자 승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진리는 하늘에 있는 달과 같고, 문자는 그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지만, 손가락이 없으면 달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달을 보라고 손가락을 들었더니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쳐다보는 것과 같다."
저는 이 말이 디자인 포트폴리오의 문제를 한 마디로 정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디자인 포트폴리오는 디자인 프로젝트(달)를 가리키는 자료 수단(손가락)일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포트폴리오라는 양식에 매몰되어서, 정작 중요한 디자인은 잊어가고 있습니다.
디자이너들은 누구를 위해 어떤 솔루션을 디자인할지 고민하기 보다는, 포트폴리오 양식의 구성과 장 수에 대해 고민하면서 주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나에게 디자인이란 무엇인지, 디자이너의 역할은 무엇인지, 디자이너에게 중요한 경험은 무엇인지 고민하기 보다는, 포트폴리오를 잘 만들기 위해 학원을 찾거나 유명 현직자들의 코멘트를 듣기 위해 막대한 지출을 하고 있습니다.
디자이너들이 “좋은 디자인” 보다 “좋은 포트폴리오”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수록, 시장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디자이너 수는 감소하고, 기업은 인재 채용에 어려움을 겪는 악순환이 반복될 것입니다.
이러한 악순환을 발생시키고 가속화하는 원인은 디자이너를 채용할 때 포트폴리오 평가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기업의 인재 평가 방식에 있습니다.
디자이너 채용에서 포트폴리오 평가가 가진 문제점, 포트폴리오가 없다면 어떻게 디자이너를 평가하면 좋을지에 대한 해결책, 우리 산업계가 강조해야 할 디자인 역량에 대해 정리해보았습니다.
“포트폴리오가 없다고 디자인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디자인을 보려고 포트폴리오라는 수단을 쓰고 있었더니 기업도, 디자이너도 디자인은 보지 않고 포트폴리오만 쳐다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디자인을 하는 이유를 아주 간단하게 정리하면 “우리 삶을 개선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업은 고객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제품과 서비스를 디자인합니다. 디자이너는 고객의 삶을 관찰하고, 새로운 문제를 정의하고, 최적화된 솔루션을 디자인하여 고객의 삶을 끊임없이 개선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것은 고객의 삶을 개선하는 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내 포트폴리오에 담을 프로젝트를 만드는 것과, 고객의 새로운 삶을 디자인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행위입니다.
문제는 취업을 위해 재빨리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싶은 디자이너는 어쩔 수 없이 “포트폴리오 메이킹”에만 집중하게 된다는 겁니다. 본질인 “디자인”은 뒷전이고, “포트폴리오”에만 집중하는 것입니다. 일단 포트폴리오를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프로젝트가 완성되면 포트폴리오 안에 있는 구성을 바꿉니다. 장수를 조절합니다. 프로젝트를 설명하는 텍스트를 썼다 지웠다를 반복합니다. 포트폴리오, 이렇게 만들면 되는걸까? 끊임없는 고민의 굴레에 빠집니다. 이 과정이 바로 포트폴리오 메이킹입니다.
이러한 디자이너의 고민을 악용하는 학원들은 포트폴리오를 더 쉽고 빠르게 만들어주겠다며 디자이너들을 현혹시킵니다. 학원에서는 디자이너가 타인의 삶을 개선하는 것이나 좋은 디자인을 고민하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수강생에게 약속한 포트폴리오만 만들어주면 되니까요. 심지어는 대신(또는 같이) 프로젝트를 만들어주기도 합니다. 어쩌면, 포트폴리오 학원은 양반입니다. “멋진 디자인 포트폴리오”가 필요한 디자이너들에게 몇백만원의 거금을 받고 부트캠프를 파는 거대한 장사꾼들도 있습니다.
그 누구보다 나쁜 사람들은 취준생들에게 포트폴리오 구성을 고치는 방법(포트폴리오 메이킹)을 단 20분~30분간 알려주고 돈을 받는 현직자들입니다. 그들은 본질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훤히 알면서도, 마치 포트폴리오 개선이 취업 성공의 열쇠인 것처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는 암 환자에게 타이레놀을 처방하는 것과 같은 행위입니다.
모두 수요와 공급의 일치로 굴러가는 현실이기에, 학원과 장사꾼과 현직자들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대신에 우리는 이러한 문제의 원인(의 원인)을 찾고, 디자이너들이 더 좋은 디자인을 만들 수 있도록, 기업이 디자인을 통해 성장할 수 있는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디자이너들은 포트폴리오 메이킹에만 집중하게 되었을까요?
근본적인 원인은 채용시장에서 디자이너를 평가하는 기업에 있습니다. 지난 30년간 포트폴리오에 의존하며 디자인 역량 평가에 소홀했던 기업들은 그 책임을 떠안고 ‘디자이너 인재 채용난’과 ‘디자인 경쟁력 저하’ 라는 결과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기업에서 디자이너 포트폴리오 평가하는 방식에는 3가지 주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첫 번째, 요구 역량과 평가 방식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기업들은 디자이너에게 ‘고객 문제 해결’ 역량을 강조하고 있지만, 지원자의 문제 해결 역량을 확인할 수 있는 ‘최적화된’ 방법론은 고민하지 않고 있습니다. 포트폴리오는 시각적 산출물을 담아 제출하는 데에 최적화된 서류 양식입니다. 물론 기획자나 개발자에게도 경험한 프로젝트를 정리하는 포트폴리오가 요구되고 있지만, 이는 단지 인재 채용 과정을 효율화하기 위해 제출하는 첨부서류에 기능을 확장 부여한 것일 뿐입니다(새로운 인재를 발굴해내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는 채용팀의 권태로움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포트폴리오라는 기존의 정해진 양식을 유지한 채, 지원자가 “적절하게” 고객의 문제를 해결 과정까지 담아내기를 기대하는 것이죠.
이는 평가 수단과 양식에 구애받지 않고 알아서 역량을 보여줄 수 있는 상위 1%의 준비된 인재들과 그들의 선택을 받는 극소수의 상위 기업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지만*, 99%의 지원자에게 포트폴리오는 무책임한 과제가 되어 새로운 인재가 클 수 있는 기회를 막고, 결과적으로 99%의 기업에 막대한 손실을 초래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상위 기업의 HR팀과 내부 인재들은 하루가 다르게 인재 평가 방식과 평가 기준을 바꿔가고 있습니다.
두 번째, 지원자들이 제각기 다른 문제를 풀기에 평가 자체가 공정하지 않습니다.
포트폴리오 평가에서는 지원자마다 제각기 다른 문제를 풀고 담아낸 결과물을 평가합니다. 채용 전형도 일종의 시험(test)인데, 지원자마다 문제가 다르게 주어진 상황에서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여 시험 결과를 채점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습니다.
문제가 통일되지 않으면, 특정 문제 상황이 주어졌을 때 지원자 중 누가 더 좋은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을지 알기도 어렵습니다. 지원자 A와 B가 각각 a와 b 문제를 해결한 결과를 포트폴리오에 담았을 때, 지원자 A가 b 문제를 푼 결과와 지원자 B가 a 문제를 푼 결과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회사에선 특정 고객의 문제 상황을 해결해야 하는 실무 과제가 주어지고, 그 문제를 가장 잘 해결할 사람을 찾는 것이 중요하기에, 통일된 문제 상황을 두고 상대 평가를 하는 것이 공정하면서도 효과적인 방법일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디자이너와 개발자 채용을 비교해보면, 개발자 채용에서는 ‘코딩 테스트’를 통해 지원자들이 모두 같은 문제를 풀고 동일한 기준으로 채점 받는 스크리닝 프로세스가 있는 반면, 디자이너 채용의 경우 포트폴리오라는 평가 수단에 100% 의존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평가 기준이 모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트폴리오 평가를 해야만 한다면, 디자이너 포트폴리오에 무엇을 요구할 것인지, 어떤 평가 기준을 둘 것인지에 대해 채용 팀에서 명확하게 정의해야 합니다.
채용공고에서 요구 역량을 설명하는 형식적인 문구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예를 들어 ‘데이터를 통해 고객의 문제를 파악할 수 있는 디자이너’를 찾는다면, 회사에서 디자이너가 어떤 데이터를 주로 보게 되는지, 주요 고객이 누구인지, 지금 해결하고 있는 주요한 고객의 문제는 무엇인지 정도는 기본적으로 제시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가이드라인을 통해 지원자들은 회사에서 필요로 하는 역량과 디자이너의 역할을 빠르게 인식하고, 스스로 부족한 점을 보완하여 적합한 인재로 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 2년간 저희 시작 팀은 디자이너 포트폴리오에 회의론을 쌓아왔습니다. 2,000개 이상 디자이너 채용 기업들의 목소리를 통해 포트폴리오 평가의 모호함과 디자이너 채용의 어려움을 접했고, 포트폴리오를 무한 수정하며 답답해하는 디자이너 분들의 고충을 셀 수 없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최근 시작 팀은 포트폴리오 없이 디자이너를 채용할 수 있는 (디자이너 인재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과제 전형’ 채용서비스를 파일럿 프로젝트로 진행했습니다. ‘포트폴리오 없는 디자이너 채용’이라는 컨셉은 토스의 2020년도 디자이너 채용공고를 차용했고 서비스 내에 들어가는 과제는 모두 시작 팀에서 직접 제작했습니다.
2월 한달 간 주식회사 스프린트(피트니스 코치를 위한 AI), 주식회사 하이퍼노바(AI 전화영어 앱 ‘헤이링’), 주식회사 오더체크(인테리어 간편 발주 앱) 총 3개 기업과 함께 채용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과제 1건당 평균 20명의 지원자가 발생했습니다(2개사에서 과제전형 합격 후 면접으로 이어진 지원자가 다수 있었고 최종 합격 여부는 3월 초 기준 아직 미정입니다).
시작 팀이 고안한 과제 평가 방식은 위에서 언급한 포트폴리오 평가 방식의 문제 3가지를 다음과 같이 해결했습니다.
첫 번째, 회사/포지션마다 요구되는 디자인 역량을 구체적으로 정의하고 이를 직관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case 과제를 제작했습니다.
회사에서 필요한 역량을 검증하되, 무료 노동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채용 회사의 비즈니스에 활용되지 않는 가상의 인물과 상황을 설정하는 case 기반의 유사(mock) 테스트를 제공했습니다.
두 번째, 지원자에게 모두 동일한 문제를 제공하여 공정한 상대평가가 가능하게 했습니다.
포트폴리오처럼 지원자들이 서로 다른 주제로 진행한 프로젝트가 아닌, 동일한 프로젝트(문제)를 해결한 결과물을 비교할 수 있기에 공정한 평가가 가능해졌습니다. 채용 회사는 특정 문제 상황을 두고 누가 가장 잘 해결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세 번째, 과제 평가의 기준을 구체적으로 밝혔습니다.
채용공고에서의 요구 역량을 기재한 데에서 그치지 않고, 과제 가이드라인을 통해 평가 기준을 명확히 밝혔습니다. 이를 통해 후보자들이 중요한 역량을 짐작하고 특정 영역에 집중하여 효율적으로 작업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참고) 시작팀이 제작한 과제 전형 전문보기
1. 주식회사 스프린트 - 컨텐츠 디자이너 채용
https://slashpage.com/szk-spt-cd1?e=1
2. 주식회사 하이퍼노바 - 프로덕트 디자이너 채용
https://slashpage.com/szk-hyp-pd1?e=1
3. 주식회사 오더체크 - 프로덕트 디자이너 채용
https://slashpage.com/szk-ock-pd1?e=1
이 글에서는 디자이너의 ‘포트폴리오 평가’ 만을 주제로 다뤘지만, 전체 산업계에서 낡은 인재 평가 방식을 고수해온 것이 비단 디자인 업계만은 아닐 것입니다.
외교, 정치, 경제, 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세상에서는 ‘인재(Human Intelligence)’에 대한 정의도 빠르게 바뀌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너무나 안타깝게도 한국은 지난 100년의 역사를 거쳐 대학 입시 위주 교육이 한국 인재 시장의 깊은 뿌리로 자리잡아버렸고, 대학과 대기업이 맺은 굳은 연결고리로 인해 인재 시장은 매우 둔하게 움직여왔습니다. 이제는 기업이 먼저 인재 기준과 평가 방식을 빠르게 바꾸어야 할 때입니다.
참고로… 필자는 고려대학교 경영학과(16학번) 졸업자입니다. 지난 100년간 대기업과 견고한 연결고리를 지키며, 졸업장만으로도 대기업 취업을 보장해주었던 학과를 나왔습니다. 희망적인 사실은, 제가 입학할 당시와 대략 10년이 지난 현 시점을 비교했을 때, 학부생들이 느끼는 취업 난이도가 매우 급격하게 높아졌다는 것(높아진 인재 기준)입니다. 변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국내 대기업들이 - 경기침체든 고령화든 그 어떤 원인이든 간에 - 자체적으로 치밀한 인재 기준을 만들나서 새로운 평가 방식까지 도입한다면, 한국의 인재들과 산업계가 빠른 속도로 동반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를 걸어봅니다.
디자이너 인재의 중요도가 높은 팀, 우리 회사에 맞는 인재 기준을 적용하고 새로운 평가 방식을 도입하여 최고의 인재를 채용하고 싶으신 팀은 저희 시작 팀에 연락주시기 바랍니다(seezak.team@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