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엘리펀트 송>
작은 반짝임들이 거리를 가득 채우는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어김없이 생각나는 작품이 하나 있다. 소극장 무대 위에 놓인 커다란 창문과 그 너머로 펑펑 내리는 눈. 그 안에 놓인 따뜻한 조명과는 사뭇 거리가 있어 보이는, 서늘한 옥빛의 어느 방. 그 안에는 한 아이가 아주 아끼는 코끼리 인형 하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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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연극 <엘리펀트 송>의 자세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행방불명이 된 의사 로렌스를 찾기 위해,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마이클을 만나러 온 그린버그. 무대 아래에 앉아 그들을 보는 관객은,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시놉시스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매우 제한적인 탓에 우리로서는 그저 마이클이 어떤 이야기를 할지 귀 기울이는 수밖에 없다. 마치 그린버그처럼.
마이클은 정말이지 알 수 없는 별종이다. 난데없이 코끼리 이야기를 늘어놓지 않나, 로렌스가 자신에게 몹쓸 짓을 저질렀다느니, 피터슨이 그것을 방치했다느니 허무맹랑한 말을 늘어놓지 않나. 관객은 그 내용에 경악하면서도 과연 마이클이 한 말이 진실인지 혹은 거짓인지 파악하기 위해 눈치를 살피게 된다.
마이클은 로렌스의 행방을 알고 싶다면 다음의 세 가지 조건을 지켜달라고 그린버그에게 제안한다. 첫째, 자신의 진료 기록을 보지 말 것. 둘째, 자신에게 초콜릿을 줄 것. 셋째, 피터슨을 이 모든 상황에서 제외할 것.
달리 방법이 없는 그린버그는 마이클의 조건에 응하고, 그의 게임에 뛰어들게 된다.
점차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마이클은 더이상 천재 계략가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가 얼마나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얼마나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그것에 대한 불신을 가지고 있는지도. 코끼리는 이렇게 위태로운 마이클에게 다양한 상징으로 작용한다.
"코끼리는 포유류 중에 임신 기간이 제일 길대요.
22개월. 대단하지 않아요?
22개월이나 엄마 뱃속에 있다니, 부럽다."
모성애가 강하기로 유명한 코끼리는, 마이클에게 마치 꿈같은 존재이다. 날 때부터 어머니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던 탓이다. 톱스타 오페라 가수였던 어머니는 한 남자와의 하룻밤에서 의도치 않게 마이클을 얻었고, 아이가 태어난 이후에도 큰 관심을 쏟아주지 않았다.
"코끼리는, 사랑하는 코끼리가 죽으면 슬퍼할 줄도 안대요."
코끼리를 향한 마이클의 애착은 8살 때 아프리카로 아버지를 만나러 간 이후에 생긴다. 사파리에서 여러 동물을 보며 감탄하던 마이클의 눈 앞에서, 아버지는 가차없이 총으로 코끼리를 쏴 죽인다. 죽어가는 코끼리를 보며 마이클이 느꼈을 두려움은,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다.
하지만 아프리카 여행의 끝에, 마이클은 어머니에게 선물을 하나 받는다. 바로, 코끼리 인형 '안소니'다. 그 순간 마이클은 어떤 희망을 느꼈을 테다. 어쩌면 나도 어머니에게 사랑 받고 있을지도 몰라. 어쩌면 어머니에게 내가 소중한 존재일지도 몰라.
마이클은 그러한 사랑의 증표인 안소리를 항상 데리고 다니며 애착을 표한다. 슬프게도, 어머니는 이 이후로 마이클의 희망에 부응해주지 않는다.
너무나도 갖고 싶지만, 폭력적인 누군가에 의해 아주 쉽게 죽어버리는 존재. 마이클에겐 그런 존재였을 것이다. 코끼리도, 사랑도.
마이클이 원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는 몇 번이고 자유를 갈망한다고 말한다. 그 자유는 사랑 그 자체일까, 아니면 사랑을 향한 갈증으로부터의 자유일까?
마이클이 그린버그에게 제안한 세 가지 조건은 '죽음'을 쟁취하기 위해 철저하게 계산된 조건이었다. 첫째, 자신의 진료 기록을 보지 말 것. 그린버그가 읽지 않았다고 했던 마이클의 진료 기록에는 그가 견과류 알러지를 가지고 있다는 정보가 적혀있었다.
둘째, 자신에게 초콜릿을 줄 것. 마이클은 열 수 없는 로렌스의 책상 서랍에는 초콜릿이 있었다. 아몬드가 들어간 초콜릿이. 그리고 마이클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셋째, 피터슨을 이 모든 상황에서 제외시킬 것. 그린버그와 대화할 때면 마이클은 피터슨을 경멸한다는 듯이 말했지만, 사실 간호사 피터슨은 마이클을 깊이 이해하는 따뜻한 사람이다. 마이클 역시 마지막에 안소니를 그에게 남길 정도로 그를 사랑했다. 그리고 당연히, 피터슨은 마이클의 견과류 알러지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담당의사 로렌스는 홀연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누나가 아프다는 연락을 받고 눈물을 흘리며 급히 달려갔고, 사정을 설명하는 쪽지를 남겼지만 마이클이 그것을 숨겼던 것이었다. 아무도 로렌스가 없어진 이유를 모르도록.
마이클은 로렌스 덕분에 '사랑받는 기분'을 처음으로 느꼈다고 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본 로렌스의 눈물에, 그 사람이 자기자신을 위해서도 그렇게 울어주길 바랐다. 그리고 결국 정말로, 자기자신을 위해 로렌스가 울게 만들었다. 자신을 죽음으로 데려갈 초콜릿을 입에 넣고, 그 사실을 그에게 알림으로써 말이다.
마이클은 전화 너머로 로렌스가 우는 소리를 듣고 행복했을까? 마이클은 사랑을 코끼리를 통해 배웠고, 코끼리가 사랑을 표현하는 여러 방식 중에는 죽음에 슬퍼하는 것이 있었다. 마이클은 누군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로렌스 뿐만 아니라 그린버그도, 피터슨도 자신 때문에 눈물 흘렸다는 걸 알까? 그들도 마이클을 사랑했다는 걸 알까? 안소니가 사랑한대, 라고 피터슨에게 마지막 한 마디를 남긴 걸 보면, 어쩌면 그때 깨달았을지도 모르겠다. 부디 그랬길 바란다. 마지막까지 무언가 잃어버린 마음으로 세상을 떠나는 건 너무 안타까우니까.
마이클의 트라우마가, 혹은 소망이 꾹꾹 눌러담긴 대사가 무척이나 아픈 극이었다. 하지만 이런 가슴아픔과 별개로, 이 극을 본 사람은 무엇을 느껴야 하는 것일까, 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마이클은 그린버그에게, 자녀를 아낌없이 사랑해주라고 청한다. 스스로 그렇게 사랑받고 싶었던 것일 테다. 이런 마이클의 아픔에서 '서로를 사랑해주자, 자녀를 사랑해주자'라는 결론을 얻어낸다는 것이 조금은 껄끄럽기도 하다.
이 극에서 사람들이 마이클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무엇이었을까? 유일하게 마이클을 행복하게 해주었다던 로렌스마저도 결국은 죽음의 빌미를 제공한 모양새가 되었고, 진심으로 마이클을 아꼈던 피터슨도 그의 삶을 지켜주진 못했다. 그린버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살 도구를 건네주었다.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첫 단추를 잘못 끼운 마이클은, 행복해질 방법이 정녕 없었던 것일까? 그는 처음부터 죽음의 자유를 찾을 수밖에 없는 위치에 놓여있었던 것일까?
"극은 극으로 두자"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는 나지만, 이 연극에 한해서만큼은 마이클에 대해 많은 고민이 남는다. 사랑으로 자라지 못해 여전히 아이로 남은 스물 세살의 청년, 마이클에게 무엇도 해줄 수 없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모두가 축제처럼 즐기는 크리스마스. 그 즐거운 날의 고작 이틀 전에, 웃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 작은 극 안에 있다.
2022. 12. 25.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