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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지쓰는 곰 Oct 16. 2024

검은 카페

<베를린 곰 편지>

카페가 있다.

흠집투성이 육중한 검은 출입문 앞에

시간의 때가 묻은 별 모양 타일이 박힌.

유대 별모양은 아니지만 사연이 있을 것 같아

종업원들에게 물었지만 아무도 모른다.


들어서면 어두컴컴한 통로다.

통로 오른쪽은 Bar이고, 왼쪽은 계단이다.

삐걱거리는 계단을 오르면 넓고 환한 홀이 나온다.


칠이 벗겨진 천장, 노르스름한 나무천장, 갈색 나무천장.

홀의 천장이 제각각인 것을 보면 방 셋을 하나로 튼 것 같다.

아니다. 한 집 천장이라고 하기엔 너무 이질적이다.  


천장뿐 아니라 의자와 테이블도 낡았고 제각각이다.

이 도시, 저 도시의 벼룩시장을 돌며 사 모은 것처럼.

홀 가장 안쪽 벽엔 5-6m는 족히 될 긴 의자가 있다.

찍히고, 닳고 닳아 윤이 나는

짙은 갈색의 긴 나무 의자의 고향은 

성당 벽화아래였을 법하다.


벽, 바닥, 창틀, 집기들이 제각각인 홀은

사춘기 소년의 얼굴 같다.

만의, 아직은 설익은 개성이

어눌하고 불균형한 얼굴 사이를 비집고 꿈틀꿈틀 올라오는.    


직원들은 바쁘지만 유쾌하고 친절하다.

친구에게 그러듯 손님에게 말을 건다.

손님들도 그런다.

모르는 사람에게 선듯선듯 잘도 말을 건다.


책을 읽는데

너덧 살 쯤 되는 사내아이가 계속 알짱거렸다.

눈인사를 하니까 아빠 등 뒤로 숨더니 귓속말을 했다.

아빠가 말하길 ‘안녕’하고 싶은데 부끄러워서 못한단다.

내가 ‘안녕’하니까 그제야 몸은 배배 꼬며 인사한다.

옆 테이블 할아버지가 녀석에게 말을 걸었다.

“이름이 뭐니?”

“파트릭. ”

부끄러워서 안녕도 못한다던 녀석이 말했다.

"그럼.. 넌 이름이 뭐야?"

동방예의지국에서 온 나로선 상상도 못할 풍경이었다. 할아버지가 대답했다.

"미카엘"

파트릭은 한 손으로 테이블을 잡고 몸을 아래로 쭉 늘어뜨리며 내 이름도 물었다.

“너는?”

꼬마 파트릭 덕에 애 아빠, 할아버지와 통성명을 했다.      



검은 카페는 손님들도 제각각이다.

페인트가 묻은 작업복을 입은 남자,

낡은 모직코트를 입은 할아버지,

코르사주가 달린 털모자를 쓴 할머니,

유모차를 끌고 온 젊은 커플,

책 읽고 토론하는 학생들,

신나게 웃고 떠드는 친구들,

꿀이 떨어지는 멋쟁이 연인,

3대가 함께 꼬마숙녀생일을 축하는 대가족,

혼자 책 읽거나 컴퓨터 작업 중인 사람….

각기 카페에서 할 수 있는, 하고 싶은 걸 한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말을 하지만

소리 난반사가 심하지 않아서 목청을 높일 필요가 없다.

소통에 최적화됐을 뿐 아니라 소통을 부추기는 장소다.

화장실조차.


‘검은 카페’의 여자화장실은 두 칸이다.

두 칸을 가르는 벽 중간엔 하트모양의 철제쪽창이 있다.

처음엔 그저 장식이려니 했다.

그런데 옆 사람이 변기에 앉다 문을 잘못 건드리자

‘삐걱’ 열려서 황급히 붙들었다.

하마터면 옆 칸 변기에 앉은 사람과

수다를 떨어야 할 뻔했다.

이보다 더 소통을 부추기는 화장실이 있을까?


걸쇠가 망가진  쪽문이

위태롭게 소통을 유발하는데도

‘검은 카페’는 한동안 소통유발자를 손보지 않았다.

방귀 뀌고 똥을 누며 옆 사람과 담소를 나누는 카페로

명성을 날리려는 것 아냐 하는 의심이 들정도로 제법 오래.


그러면 카페에 있는

어떤 손님은 그런 일을 웃으며 받아들일 것 같다.

어떤 손님은 정색하고 항의할 것처럼 보이고,

어떤 손님은 민망해서 어쩔 줄 모를 것 같다.

어떤 손님은 문이 열린 걸 모르고 볼일에 집중할 것 같고,

어떤 손님은 부러 문을 열만큼 짓궂어 보이고,

어떤 손님은 망가진 문을 섬세하게 손보고 싶어 할 것 같다.


베를린에서 처음으로 맞이했던 겨울은 우울했다.

10월 말부터 두텁게 낀 구름은

20일가량 파란 하늘을 한조각도 보여주지 않았다.


겨울 베를린 거리는 장례식장 같다.

우중충한 날씨에

사람들이 대부분 검은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를린엔 검정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심지어 베를린에서 제일 유명한 클럽 베르크하인의 기도가 선호하는 색도 검정이란다. 


베르크하인은 테크노음악의 성지이며

자유롭고 개성적인 분위기로 유명하다.

베르크하인의 ‘기도’는

잔뜩 멋을 내고 몇 시간을 기다린 사람들을

단호하게 퇴짜 놓는 걸로도 유명하다.

기도가 손님을 퇴짜 놓는 이야기야 그리 특별할 것이 없지만

베르크하인의 퇴짜가 유명한 것은

퇴짜 놓은 이유가 여느 클럽들과는 좀 다르기 때문이다.


어학원에  애인이 베르크하인의 기도인 친구가 있었다.

마이에미에서 온 사나이 제이. 그가 말했다.  

여기서 베르크하인에 입장할 수 있게 옷 입는 사람이 없어.

그 말에 엘이 발끈했다.

클럽에 갈 때 한 번도 퇴짜 맞은 적이 없다며.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차림은 늘 패션잡지에서 갓 나온 것 같았다.

제이가 말했다.

베르크하인에는 할아버지, 할머니도 들어가고

잠옷 로브를 입은 사람도 들어가지만

명품 옷을 세련되게 입은 사람은 퇴짜를 맞는다고.

모범생 스타일,

멋을 부린 티가 나는 스타일,

알록달록 화려한 스타일,

관광객스타일은 백 퍼센트 퇴짜라고,

베를리너 스타일이 가장 안전하다고.

너도 베를린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면서 베를린 스타일을 어떻게 알아?

누가 이렇게 말하자 제이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알아. 일단 검정.”


그의 말에 동의한다.

온갖 빛깔이 어우러져 탄생한 검정.

베를리너 스타일은 일단 검정이다.  



“검은 카페 -

밤 올빼미들과 낮의 몽상가들을 위한 장소.

우리는 다채롭고 다양한 베를린을 지지한다.

조식과 신선한 커피를 한밤중에,

점심식사로 칵테일을

무엇이 정상인가?

우리에게 그런 질문은 성립하지 않는다.

나는 나이고 너는 너이다.

존중이 가장 중요하다.

1978년 9월 2일부터 우리는 당신을 위해 여기 있다.

즉흥적이고,

혼돈스럽고,

개방적이고

사랑이 충만한 채로. “     

- 검은 카페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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