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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피 Jun 02. 2024

돌싱공화국 - 7

이혼하면 어때 #39

약속장소 근처 벤치에 앉아 그녀가 오길 기다렸다.

주변에 혼자 누군가를 기다리는 남녀가 많았다. 다들 연인을 기다리는 표정과 몸짓이었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 나랑 비슷했거든.


한참을 기다렸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여태껏 살며 배워온 경험과 직관이 말한다.

지금은 매우 중요한 인생의 타이밍이다. 라고.


그때였다.

지하철 출구 계단으로부터 올라오는 그녀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상반신이 다 보일 무렵 벤치에서 일어나 마중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따뜻하고 포근한 공기가 나를 마주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기분 좋은 바람이 부는구나.


***


때론 사람의 직관이 초능력으로 느껴질 만큼 들어맞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사실, 살아오며 축적된 경험과 간접적으로 얻어진 지식을 기반으로 형성된 통계의 결과치이지만.


그녀는 아름다웠다.

긴 웨이브 머리칼과 작은 얼굴, 그리고 동양인에게 찾기 힘든 긴 팔다리가 빛나는 날씬한 몸매는 뭇 남성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녀에게 다가가 웃으며 말했다.


"어서 와요."


약간 긴장한 눈빛으로 내 주변을 둘러보다 고개를 살짝 숙여 목례하는 그녀.


"식사 안 했죠? 근처에 맛있는 집이 있는데 거기로 가요."


미리 생각해 둔 음식점을 언급하며 그쪽으로 걸었다. 걷는 동안 무수한 잡념이 머릿속을 지배했지만 곧 그녀의 발걸음에 집중했다. 그녀의 보폭과 맞춰 걸으려는 내 모습에 가벼운 놀람을 느끼며.


도착한 음식점은 유명한 맛집이라 대기하는 커플이 몇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대기자 명단에 이름과 연락처를 적어놓고 웨이팅 하는 사람들 뒤에 섰다.


"여기 맛집인가 봐요. 잠시 기다리는 것 괜찮죠?"


그녀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귀엽다고 느껴졌다. 항상 차가운 표정과 말 없는 분위기가 주된 그녀였지만 지금은 왠지 모르게 보호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연인이 되려면 이런 감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잠시 후 우리 순서가 되어 음식점에 들어갔다. 들어간 곳은 마주 보는 테이블 형태가 아닌 바가 있고 건너편요리와 서빙하는 종업원이 보이는 자리배치였다. 종업원이 지정하는 자리에 착석하고 음식을 주문했다. 그리고 말했다.


"근데 오늘 무슨.."

"저기.."


둘이 동시에 말을 꺼내 살짝 민망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다시 내가 말했다.


"먼저 말씀하세요."


마스크를 벗은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봤다. 내가 잘 모르는, 관심도 없는 카페 사람들의 얘기를 나에게 들려주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녀에게 말하고 싶었다.


진짜 하고 싶은 얘기는 이게 아니잖아요.


일상 얘기를 하며 식사를 마치고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잡담의 시간이 지나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

"..."


비장하게 앉은 자세를 고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제가 다소 충동적일 수 있는데..."


그 말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드디어.'

그렇게 혼자 망상 아닌 망상을 하며 다급히 대답했다.


"네. 말씀하세요."


그녀는 잠시 앞에 있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흐음. 혹시 지금 만나거나 썸 타는 여성이 있으신가요?"


이제서야 나는 긴장의 끈을 조금 놓기 시작했다. 내가 아주 정신병자급 망상을 한건 아니구나 하고.


"아. 오해하지 마세요. 제가 이렇게 물어보는 것은 혹시나 제가 시간 뺏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기도 하고.."

"하고..?"


뒷 말을 줄이는 의도가 명확하지 않았지만 묻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현재 상황을 솔직하게 말했다.


"사귀는 사람은 없어요. 다만, 얼마 전부터 쪽지로 알게 되어 연락하는 여성 분이 있는데 그게 썸이라면 썸일 수도 있겠네요."


그 말을 들은 그녀는 내 눈을 똑바로 주시하며 몇 초간 응시했다. 진실을 판별하려는 판사와도 같은 눈빛.


"그럼..."


잠시 뜸을 들인 그녀는 조용한 목소리로 얘기했지만 내 귀에는 천둥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지금 썸 타는 여자 정리하고 연락 주세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정리하고 연락을 달라니.

나는 머릿속이 하얗게 되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당당하고 거침없는 말이라니. 심지어 자기가 까일 거란 일말의 의심도 없이.


제길. 존나 멋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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